오는 10월 19일은 소위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발한 지 77년이 되는 날이다. 여순사건은 발단부터 결말까지 단일한 서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현대사의 비극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순사건=반란(反亂)+반란군의 군경·양민 학살+진압 과정에서의 국가폭력’이라는 상식과 달리 ‘여순사건=국가폭력’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지금 그들의 주장은 ‘정론’으로 강요되고 있다.
전북경찰청 홍보관 논란이 이를 잘 보여준다. ‘CBS 노컷뉴스’란 매체에 따르면 전북 경찰은 청사 1층 홍보관에 “여순반란 공비를 수색하는 경찰”이라는 제목의 사진과 안내문을 게시했다. 전북 경찰이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 진압에 참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북경찰청 관계자는 “해당 사안을 인지하지 못했다”며 “속히 해당 문구를 교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여순사건의 발단이자 핵심 사건인 반란을 반란이라 했다는 이유로 전북 경찰은 공격을 받았다. 전북 경찰은 보도 당시까지 “정부 수립 전후 전북 경찰은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질서를 유지했다. 도내뿐 아니라 타지방에서 발생한 좌익 세력의 반란과 소요를 원정 진압해 많은 성과를 거뒀다”라고 기록하며 조직의 역사를 자부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 같은 사실마저 사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여순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양민이 희생당한 비극적인 사건”으로만 말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제14연대 군내 좌익 세력이 일으킨 사건을 신생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한 군사반란이라고 했다가는 ‘망언’이라는 비난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런 인식이 정치권, 학계, 언론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들의 여순사건 추모·기념 사업에까지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여순사건을 기리는 각종 기념 시설, 추모사업 명칭과 그 내용을 보면 그렇다. 특히 《월간조선》이 취재한 결과 여순사건 관련 지역 중 전남 순천시, 구례군의 경우 여순사건을 ‘항쟁’이라고 표현하고, 이와 같은 문구가 있는 시설을 조성하는 데 세금을 지원하거나 부지를 제공했다. 지금 이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여수 제14연대의 반란으로 비롯”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발생한 각종 국가폭력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치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6권》에는 여순사건의 발단에 대해 “여수 제14연대의 반란으로 비롯됐다”는 기술이 있다. 또 같은 해에 내놓은 《종합보고서 3권-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는 다음과 같이 ‘여순사건 배경과 전개 과정’이 기술돼 있다.
〈육군본부는 10월 19일 오전 7시 여수 제14연대에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반대하는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여순사건의 시작이었다. 제14연대 반군(反軍)은 지창수 상사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해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여수를 장악했다. 10월 20일 반군 주력부대가 시내에 진입해 교전이 벌어졌으나, 소수의 경찰 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에 들어오자 여수의 좌익계 주민 600여 명이 합세했다. 10월 20일 오전 9시, 반군은 여수를 완전히 장악했다. 제주도 파견거부병사위원회는 ① 제주도 출동 반대 ② 미군 즉시 철퇴(소련군을 본받아서) ③ 인공수립 만세 등의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읍내 곳곳에 붙였다. 반군은 주요 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기관장·우익청년단원·지역 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경찰·우익 학살, ‘비협조’ 주민도 살해”
공식 국가기관이 각종 증언, 자료, 군경 기록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보고서에는 분명히 ‘여수·순천 10·19 사건’의 발단을 ‘제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의 반란’이라고 명기돼 있다. 해당 사건명에 ‘순천’이 들어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수를 장악한 반군 2개 대대는 오전 9시30분경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해 순천으로 북상했다.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합류했다. 광주에서 급파되어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되었던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가담했다.
10월 20일 오후 3시경, 반군은 순천 시내를 완전히 점령했다. (중략) 남원·구례·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전에 지방 좌익들이 이미 장악하여, 제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 활동을 하던 지역 민애청원(민주애국청년동맹, 남로당 청년조직), 노조원, 남로당계 학생 등도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진화위 2010년 종합보고서 3권 72~73쪽〉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는 반군·좌익의 반란과 빨치산 활동, 군경의 진압 과정에서 발생했다. 진화위 보고서(80~87쪽, 114~120쪽)에 따르면 1948년 10월 여수·순천을 장악한 제14연대 반군은 인민위원회를 조직해 경찰·우익 인사들을 체포·살해하고, 식량 제공을 거부한 주민까지 학살했다. 반군은 보성·고흥·구례·광양까지 진격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경찰과 대한청년단 간부, 지역 유지들을 처형했다.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반군과 빨치산은 짐꾼 강제 동원, 보복 살해, 식량 강탈로 주민들을 위협했다. 진압군은 10월 23일 순천을 시작으로 보성·광양·여수를 탈환하고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색출 과정에서 머리 모양, 손바닥 흔적 등 외형적 기준이나 주민 고발에 의존하면서 무고한 이들까지 즉결 처분됐다. 실제 좌익 활동 여부와 무관하게 단지 빨치산이 드나드는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로 희생된 사례도 많았다.
여순사건이 항쟁?
그 뒤 전개된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다수 발생했다. 국가는 이에 대해 반성하고 억울한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추모와 보상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억울한 희생’과 ‘반란’은 분리해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국가폭력’만을 부각하려는 행태는 여순사건의 비극을 특정한 프레임 속에 몰아넣고,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시도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본의 아니게 여순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훼손하고,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전남 동부권의 순천시와 구례군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을 ‘항쟁(抗爭)’이라 부른다. 앞서 밝혔듯 이 같은 취지의 시설물이 세금으로 운영·관리되는 공간에 서 있다.
항쟁의 사전적 의미는 ‘맞서 싸운다’지만,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쓰임새는 좀 다르다.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한 민중의 저항이라는 긍정적 가치 판단이 내포돼 있다. 독재나 권위주의 권력에 맞서 자유와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민들의 집단적이고 정당한 투쟁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부마민주항쟁(1979), 6월 민주항쟁(1987)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반대로 군사반란처럼 국가정통성을 부정하거나, 무장 폭력을 동원한 사건은 ‘항쟁’으로 부르지 않는다. 저항의 정당성이 없고, 민주적 질서를 부정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협하며, 자유와 인권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와 반대되는 방향을 지향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여수·순천 10·19 사건’을 ‘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감을 얻기 쉽지 않다.
‘동족상잔’에 대한 참회로 일어난 무장 반란?
9월 4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동리 봉성산 자락에 있는 구례현충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2013년 4316㎡ 규모로 조성된 공간이다. 공원에는 현충탑을 비롯해 6·25 전쟁, 월남전 참전유공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중심부에 서 있는 현충탑은 1951년 건립된 뒤 1987년 재건립됐고, 201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현충탑은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다섯 용사와 불꽃 형상으로 이뤄져 있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 군인들의 용기와 희생, 그들의 꺼지지 않는 애국혼을 상징하는 듯했다. 현충탑 뒤편에는 구례 출신 호국영령들의 이름을 새긴 추모 벽이 있었다. 현충탑 좌측에는 참전유공자기념탑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공간’인 현충공원과 어울린다고 보기 쉽지 않은 ‘여순 10·19 항쟁 구례 위령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순항쟁위령탑’ 구역 어귀의 안내판에는 ‘여순 10·19 우린 너무 몰랐다’란 제목 아래 이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여순 10·19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제주 4·3 진압 출동 명령에 대해 “동족상잔”에 대한 참회와 거부에서 일어난 무장 반란이다. 사건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데에는 진압군의 양민 학살이 크며, 진압 군경과 우익 세력들은 봉기에 동참한 주민과 민간인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미명하에 대대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결국, ‘여순사건’과 관련된 희생자는 경찰·군인·민간인을 포함하여 수만 명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빌미 삼아 반공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사건의 명칭조차 의견이 다양하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생명의 존엄성이 유린된 역사적 상처를 참된 지혜로써 평화와 화해, 민족의 통일로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주 4·3’도 항쟁, ‘반란’은 봉기
이 글의 작성자는 ‘참회’와 ‘거부’ 운운하며 여순사건의 발단을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조직적 반란이 아닌 ‘동족상잔을 거부’한 윤리적 저항이란 식으로 주장했다. 반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은 외면했다. 기존 통계와 달리 희생자 수를 ‘수만 명’이라고 과장했다. 지금껏 여순사건 희생자 통계 중 최대치는 1949년 전라남도가 집계·발표한 1만1131명이었다. ‘수만 명’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도 없었다. 공식 명칭이 분명한데 “의견이 다양하다”고 주장한 대목 역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어 본질을 흐린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결론에서 ‘화해’와 ‘민족 통일’을 강조한 대목도 사건의 본질과 동떨어진 추상적 구호일 뿐 아니라, 사건 당시 반란 세력의 ‘통일 정부’ 주장을 합리화하는 취지로 오독(誤讀)될 소지도 배제할 수 없었다. ‘여순항쟁위령탑’ 좌측에는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출신 ‘희생자’의 이름을 새긴 석판이 있었다.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여순항쟁 이후 유족들은 통한과 설움, 강요된 침묵 속에 한을 안고 살아오던 차 구례군의 도움으로 석판 위에 희생자 함자를 한 분 한 분 새겨 올려 뜻을 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원혼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하오니 이제 눈물을 거두시고 통곡이 용서가 되게 하옵시며, 증오가 화해의 길이 되게 하여 주소서. 부디 해원 안식을 비옵니다. 여순항쟁 71주기를 맞아 2019년 10월 19일〉
‘여순항쟁위령탑’ 앞 ‘여순 10·19 사건 개요’를 적은 석판에는 또 아래와 같은 설명이 있었다. 이 글을 쓴 이는 과연 어느 쪽에 도덕적·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사건의 원인과 희생자 발생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누구에게 묻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과 정부 수립의 혼란기인 1948년 10월 19일 당시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 중이던 국군 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군인들이 제주 4·3 항쟁 이후 제주도를 진압하라는 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주도의 동족을 살생할 수 없다’ ‘우리는 남북통일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친일 반역자들을 타도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을 거쳐 섬진강을 넘어 지리산으로 들어와 진압군이 봉기군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구례군 일대 곳곳에서 약 3000여 명이 희생당한 우리 민족사의 씻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순천시 곳곳의 ‘여순항쟁 유적지’ 입간판
9월 5일, 전남 순천시에 갔다. 순천시청 등이 있는 시내 중심가 장천동에서 순천교(장대다리)를 건넜다. 1948년 10월 20일 오전, 여수에서 철로를 통해 광주시로 북상하려던 14연대 반란군은 순천에서 철도가 차단되자, 세 갈래로 순천 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과 우익 청년단은 순천교에서 반란군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장대다리 전투에서 반란군은 경찰·청년단을 제압했다. 이런 와중 정부에서 진압군으로 보낸 광주 주둔 4연대 일부가 반란군에 합류했다. 원래 14연대는 전남·북을 관할하는 4연대에서 전남 동부 지역 방어를 위해 분리·배치된 부대였던 만큼, 병사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란군은 경찰 방어선이 무너지자 곧바로 순천 시가지를 장악하고,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체포된 경찰관 70여 명을 순천경찰서 앞마당에서 군중이 보는 가운데 총살하거나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우익 인사들도 학살됐다. 그 순천교를 건넌 후 ‘여순10·19평화공원’에 도착했다. 이곳은 순천시가 2021년 장대공원 우측 구역(순천역 방향)에 ‘여수·순천 10·19 사건 특별법’ 제정을 기념하고, 지역사회에 올바른 역사 인식을 전하기 위한 추모의 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새로 지정한 공원이다. 이곳 입구에는 ‘여순항쟁 유적지 안내 입간판 설치 장소’란 입간판이 서 있었다. 해당 시설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순천시내 31곳에 이른바 ‘여순항쟁 유적지’임을 안내하는 입간판이 설치돼 있다. 공원 안쪽에는 여순사건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인 ‘뒤틀린 총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좌우의 엇갈린 형상은 얽혀진 이념에 의해 뒤틀린 총의 형상”이며 가운데의 핏방울은 “피 흘린 희생자들의 아픔”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 된 조국’과 ‘평등한 사회’를 꿈꿨다?
순천시 연향동 팔마종합운동장으로 갔다. 이곳은 경기장, 체육관, 수영장 등이 있는 순천시의 대표적인 공공 체육 시설이다. 운영·관리자는 순천시 체육시설관리소다. 체육관 동문 쪽으로 갔더니, ‘여순항쟁탑’이 보였다. 여순사건이 ‘항쟁’일 수 있을까. 당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과정을 ‘맞서 싸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반란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된 양민들, 아무런 잘못이나 허물없이 누명을 쓰고 국가폭력에 쓰러진 이들이 그 무슨 ‘항쟁’을 했다는 것일까.
탑 옆에 있는 ‘사건 개요’ 비문도 구례군과 유사한 내용이었다. 사건의 발단을 ‘제14연대 군인들이 동족상잔을 거부해 일으킨 무장봉기’라는 식으로 주장하며 반란군을 ‘봉기군’이라고 칭했다. ‘봉기(蜂起)’의 사전적 정의는 ‘벌떼처럼 떼 지어 세차게 일어남’이다. 권력이나 외세에 맞선 민중의 저항을 긍정적으로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를 고려하면 1948년 10월 19일 반란을 일으킨 제14연대를 가리켜 ‘봉기군’이라고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이들을 봉기군이라고 부르면, 반란군의 반역성과 군경과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의 폭력성이 희석될 위험이 있다. 피해자 유족 입장에서도 가해 세력을 ‘봉기군’으로 호명하는 것은 2차 가해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어서 비문에는 여순사건 당시 ‘희생’된 이들이 ‘하나 된 조국’과 ‘평등한 사회’를 꿈꿨다고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반란군의 학살과 진압군의 토벌 과정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양민들이 과연 이런 ‘꿈’을 품고 있었다는 말인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부분이다. 다음은 비문에 적힌 내용이다.
〈진압군경과 우익 세력들은 봉기군에 가담하거나 협력했던 사람들을 ‘손가락총’으로 찾아내는 등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발생시켰다. 봉기에서 한국 전쟁까지 항쟁과 토벌이 이어지는 동안 ‘여순사건’과 관련된 희생자는 군경과 민간인 등 모두 1만여 명에 이른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독재국가 체제를 강화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였으며, 희생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묶여서 이루고 싶은 꿈을 접고 힘겹게 세상을 살아야 했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하나 된 조국과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다가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고,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세웠던 위령탑 옆에 사건의 개요를 담은 돌비를 희생자 유족의 성금을 모아 세우는 바이다.〉
참고로 이 탑 뒤편에는 6·25 전쟁 당시 공산 침략 세력에 맞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호남 지역 호국영웅들의 공훈을 선양하는 호남호국기념관이 있다.
순천시와 구례군의 행태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전남 구례군과 순천시에 있는 소위 ‘항쟁위령탑’ ‘항쟁탑’과 여순사건 시설물에 기재된 내용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역사적 상식’과 거리가 있다. 진화위 보고서만 봐도 그렇다. 또한 우리 법원이 인정한 ‘반란’을 ‘항쟁’으로 미화하는 행태도 동의하기 어렵다. 대법원은 2019년 3월 21일 전원합의체 판결(2015모2229 재항고 사건)을 통해 여순사건에 대해 “여순사건은 여수 제14연대의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나, 반란 과정뿐만 아니라 국가 공권력이 이를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또 “여순사건 초기 반란군들이 좌우익 갈등의 보복 차원에서 경찰과 시민들을 총살했고, 이후 진압군이 지역을 탈환한 뒤에는 보복의 보복이 이어졌다”고 적시했다. 아울러 국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과 집단폭력도 확인하면서, 당시 재판을 통해 형성된 외관, 즉 ‘반란군에 협조한 반국가적 범죄자’라는 낙인이 피고인들과 유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불명예로 남았다고 지적했다.
당시 판결의 핵심은 국가의 책임과 민간인 학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사건의 발단인 제14연대의 행위를 분명히 ‘반란’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이미 대법원 판례에서도 ‘반란’임이 명확히 적시돼 있는데도, 이를 ‘항명’으로 축소하거나 ‘봉기’와 ‘항쟁’으로 미화하는 해석은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법적 평가 모두와 괴리된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와 유족회 등 민간에서 제기하는 이런 주장을 두고 굳이 논박할 필요는 없다.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 범주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순천시나 구례군처럼 공공기관의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적 영역에서 일부 학자나 유족회의 주장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쉽게 용납되기 어렵다.
“지역 정서 반영해 항쟁탑 명칭 유지”
먼저 구례군에 물었다. 다음은 구례군 총무과 자치협력팀 관계자와의 문답이다. 첨예한 견해 차이가 있었던 만큼 비교적 상세하게 그 내용을 옮긴다.
― 구례현충공원에 있는 여순사건 관련 시설들 있지 않습니까? 그 비문을 보니까 ‘여순 10·19 항쟁’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그게 구례군의 입장인가요.
“법적인 용어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유족회에서 그걸 ‘항쟁’이라고 부르기를 원하셔서, 저희가 지역 정서를 반영해서 그렇게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 항쟁이라는 표현을 유족회가 원했고, 구례군이 수용한 거죠? 그 시설 조성 예산은 다 어디서 댔습니까.
“도비(道費)와 군비(郡費)가 절반씩 들어갔습니다. 사실 구례 위령탑은 2013년 현충공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2005년쯤 서시천변에 있었는데, 그때부터 ‘항쟁’이라는 표현을 썼고요. 이번에는 노후 탑신을 교체하면서 기존 명칭을 그대로 계승한 겁니다.”
― 항쟁이라고 하면, 그때 희생된 분들이 들고일어났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 아니면 여수 주둔군의 군사 반란, 그걸 항쟁이라고 하는 겁니까.
“여순사건을 연구한 교수님이 계셨고, 과거 여순사건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강의도 하셨고요. 그런 영향이 있습니다.”
― 그건 그 학자 개인의 입장이고요. 저는 구례군이라는 공공기관의 입장을 묻는 겁니다. 구례군이 관리하는 시설물에 여순사건이 ‘항쟁’이라고 표현돼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걸 군의 공식 입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지역 정서를 반영한 겁니다.”
― 지자체가 지역 정서를 이유로 ‘항쟁’이라는 표현을 쓰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감히 말씀드리면, 민간인 희생이 많았습니다. 군과 빨치산 사이에 끼여 민간인들이 희생당했죠. 민중 입장에서는 ‘항쟁’이 저항이 아니라 불리한 힘에 대응한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고. 그래서 유족들이 그 표현을 선호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혹시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까.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논란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습니다. 저희 업무는 희생자 유족의 명예회복을 돕는 것이고, 그래서 법적 용어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사건’이라고 하면 반발도 많아 지역 정서상 어려움이 있습니다.”
― 그럼 이런 문제 제기가 있어도 수용할 계획은 없다는 건가요.
“정부 지침이나 사회적 합의가 있으면 교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유지하는 겁니다.”
― 이미 법정 명칭이 있는데 왜 합의되지 않았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공문 작성 등에서는 법정 명칭을 씁니다.”
“여순반란, 왜곡된 표현”
이번에는 순천시 자치행정과 관계자와의 문답이다.
― 팔마체육관 옆에 ‘여순항쟁탑’이 있는데, 그 설치 주체는 누굽니까.
“여순사건 순천유족회요.”
― 그럼 ‘항쟁탑’은 순천시와 무관한 시설인가요.
“(탑 설치 부지가) 순천시 땅이잖아요. 거기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탑을 세울 때 돈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 그 탑의 ‘여순항쟁’이라고 하는 사건은 대체 뭘 얘기하는 건가요. 여순사건에서 우리가 통상적으로 얘기하는 ‘항쟁’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까.
“그 탑을 세울 때 시는 땅을 제공했지만, 탑의 문구는 유족회에서 작성한 거라서 ‘항쟁’의 의미를 제가 이야기하기 좀…. 예전에는 여순반란, 이런 식으로 왜곡된 표현들을 하다 보니 이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여순항쟁이다, 이런 의미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들어요.”
― 유족회가 그런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순천시가 관리하는 공공시설에 이 같은 문구를 내세운 시설물이 있는 게 적절한 건가요.
“본인들(유족회)이 추모하기 위한 그런 탑이기 때문에 저희가 그거에 대해서 제재를 하거나 이러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요.”
― 순천시에서는 ‘항쟁’이라는 표현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까.
“제가 그렇게는 이야기를 드릴 수가 없죠.”
― 왜냐하면 이게 단순히 해석이 다른 게 아니라….
“역사적 해석이 다른 거 아닌가요, 그거는?”
― 이게 항쟁이라고 했을 때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의 반란을 지금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걸 진압한 국군의 행위를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냐, 아니면 그 과정에서 국군과 반란군 또는 빨치산들한테 죽은 민간인들의 희생을 ‘항쟁’이라고 하는 것이냐를 묻는 거죠. 그 희생자들은 어떤 행위를 한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 그럼 ‘항쟁’은 대체 뭘 얘기하는 겁니까.
“그 답은 여순사건 유족회에 한번 문의를 해보셔야 하고…”
― 그런 표현이 들어간 시설물이 지금 순천시가 관리하는 공공시설 안에 설치돼 있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 어떤 답변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고요.”
‘반란’ 규정에 이의 제기한 순천시 관계자
― 아까 제가 여수 주둔 제14연대의 군사반란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게 명확하지 않다는 취지로 얘기했죠?
“예, 저는 그 부분에 대한 것도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 국가기관에서 공인한 역사적 사실이 ‘군사반란’입니다. 진화위 보고서에도 ‘반란’이라고 나옵니다. 여순사건의 발단이 ‘14연대의 반란’입니다. 왜 그 ‘반란’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사건 자체가 ‘반란’이란 거는 이미 규정된 겁니다.
“예, 제가 진화위 보고서를 좀 더 봐야 될 것 같아요. 제가 그거를 좀 못 봐서 그런 것 같은데…. 역사적 규명이 됐나요? 지금 진상 규명 중이잖아요.”
― 이건 공인된 거죠. 특별법은 반란군의 학살과 진압군의 토벌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과 관련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고, 국가가 사과하고 위로하는 작업을 하자는 거죠.
“제가 그 부분은 또 확인을 한 번 해봐야 하겠어요. 지금 반란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됐기 때문에 특별법이 제정돼서 다시 규명을 해야 된다고 저는 알고….”
― 특별법 어디에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발발하게 된 그 배경부터 진상 규명이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희생자에 대한 것만 하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 1기 진화위가 활동할 때 인정받지 못한 ‘희생자’들의 사건을 다시 살피고 진상을 규명하자는 취지죠.
“아니요, 아니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주 4·3 보고서(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만 해도 그렇게 쓰여 있지 않거든요.”
참고로 순천시가 어린이 교육을 위해 운영하는 ‘어린이 순천시청’에 게시된 여순사건 관련 보고서에는 여순사건에 대해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반란으로 촉발”이라고 기술돼 있다. 또 여순사건의 발발 원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돌발적인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4연대의 일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좌익 세력들이 반란에 대한 준비를 완벽하게 갖추기도 전에 돌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중략) 둘째, 압력분산설이다. 당시 제주도 유격대에 가해지고 있던 정부 당국의 압력을 분산해 제주도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이와 더불어 본토에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을 이루기 위해 좌익 세력들이 계획적으로 발발시켰다는 관점이다. 셋째, 미국의 결의실험설이다. 즉 미국의 개입 정도가 어느 정도일 것인가를 시험해 보는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기초부터 흔들어놓겠다는 일련의 봉기로 보는 입장이다.〉
순천시가 관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자기 고장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운영하는 사이트에 게시한 연구보고서에서도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의 행위를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앞선 순천시 관계자의 주장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 그 4·3 보고서에서 사건의 시작을 뭐라고 규정했습니까. 기존과 다른 해석을 했습니까.
“그건 제가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뭘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어요.”
― 그러니까 그 시설물이 지금 팔마체육관에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지금 순천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고요. 개인적인 생각인 거죠.”
― 순천시 내부에서는 ‘항쟁’이란 표현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 그럼 이제 논의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합니까.
“저희는 공문이나 이런 거에도 여순사건이라고 다 표현을 하고 있고, 그냥 유족들 지향하는 바를 유족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제재한다거나 그러면….”
업무가 ‘여순항쟁 전반’인 순천시 주무관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순천시, 구례군 관계자는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좌익 군인들이 자행한 행위’를 ‘군사반란’이라고 확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 시설물의 ‘항쟁’ 표현을 현재로서는 바꿀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어서 ‘항쟁’이라는 문구는 유족회의 표현일 뿐 자신들은 ‘공문’에 ‘여순사건’ 등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문제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과연 그럴까.
2019년 11월 19일, 구례군 섬진아트홀에서는 구례군민과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강의가 있었다. 이와 관련한 구례군 평생교육과의 공지 내용에 따르면 강사는 철학자 김용옥씨, 주제는 ‘구례와 여순민중항쟁’이다. 구례군이 주최한 군민 대상 강좌에서 ‘항쟁’이란 표현을 썼다는 얘기다.
2022년 3월 15일, 구례군 기획예산실은 ‘구례매천아카데미 강좌 수강생’을 모집하는 게시물을 올렸다. 해당 글에 따르면 주요 강좌는 ‘향토인문학(10·19 항쟁과 구례)’이다. 향토인문학 강좌 설명에는 “10·19 여순항쟁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을 구례인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그 흔적을 답사하면서 구례인의 상처를 위로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고 명시돼 있다. 또 구례군이 운영하는 ‘구례여행’ 사이트상 ‘운조루’란 고택 소개 글에는 “동학농민운동, 여순항쟁, 그리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운조루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이란 구절이 있다.
순천시의 경우 자치행정과 주무관의 담당 업무가 ‘여순항쟁 및 과거사 전반’으로 기재돼 있다. 순천시 자치혁신과는 2020년 업무보고에서 ‘여순항쟁특별법 제정 등 지원(활동) 계획’을 첫 사업으로 제시했다. 사업 개요에도 ‘여순항쟁’이라고 명기했다. 지금까지의 추진 실적 소개에서도 ▲여순항쟁 증언 구술 채록 ▲여순항쟁 역사 바로 알기 교육 ▲여순항쟁 유적 안내 입간판 설치 ▲여순항쟁 희생자 합동 추념식 등으로 기술했다. 2021년 업무보고에서도 ▲여순항쟁의 흔적 및 상징사업 등을 통한 고증 ▲여순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민관학 공통 협력 체계 구축 ▲여순 10·19 항쟁 추모의 숲 조성 ▲여순 10·19 항쟁 문예제 등으로 표현했다. 순천시 도시공간재생과는 2023년 11월 27일 ‘메모리얼 책방 인 차차루 추진에 따른 안내’란 글을 게시했다. 이 행사의 주요 내용은 ‘여순항쟁 관련 자료집 열람 가능’이다.
위험한 지자체의 월권적 ‘역사 해석’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여순사건의 발단이 국군 제14연대 좌익 장병의 무장 반란이었다는 점은 이미 역사적·법적 사실로 확립돼 있다. 군법회의 판결,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 국가기록물 어디에도 ‘항거’나 ‘항쟁’이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부 지자체가 법적 평가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유족 일부의 주장이나 일부 학자의 ‘학설’을 추종해 사건을 ‘여순항거’나 ‘여순항쟁’으로 표현하고, 이를 전제로 기념 시설에 세금을 투입하거나 공공부지를 제공하는 행위는 여러 면에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첫째, 지자체가 앞장서 사건 성격을 ‘항쟁’이나 ‘항거’로 규정하는 것은 ‘월권’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우리 헌법과 법률 어 디에도 지자체가 역사적 사건의 성격을 새로 정의하거나 이미 확립된 국가적·법적 합의를 뒤집을 권한은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반란군에 의한 학살 기록이 분명한데도 이를 ‘여순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묶고 더 나아가 ‘여순항쟁’으로 미화할 경우,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로 인해 유족들이 바라는 진정한 희생자 명예회복은 오히려 멀어지고, 반란 세력이 ‘항쟁의 주동자와 참여자’로 추앙받는 상황이 국민 세금으로 연출될 위험도 있다.
셋째, 역사적 사실과 다른 해석, 법적 평가와 배치되는 주장에 지자체가 편승해 국민 세금을 투입하는 것은 ‘권한 남용’이자 ‘세금 낭비’라는 비판을 자초할 수 있다.
요약하면 1948년 10월 19일 당시 제14연대 좌익 장병들의 행위를 ‘반란’이 아닌 ‘항거·항쟁’이나 ‘정의로운 항명’으로 축소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민주화 운동과 군사반란의 경계를 허물고, 법적으로 반란 가담자까지 희생자로 둔갑시켜 국가 법질서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