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나라라면 제대로 수사받고 제대로 처벌받아야 되는 것이지요. 검찰이라는 사람들이 흐지부지 덮어버려요. 답답합니다. 속 탑니다. 이것 개혁해야 됩니다.” 2002년 11월 7일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충남대학교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때부터였을까. 민주당 계열 정당은 지난 20여년간 ‘검찰 개혁’을 ‘주창(主唱)’했다.
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은 정권을 잡을 때마다 검찰 개혁에 매달렸다. 최근 이재명 정부가 내놓은 검찰개혁안은 그 최종판으로 볼 수 있다. 단순 개혁이 아니라 검찰청이라는 간판 자체를 내리는 수준이다. 20여년 전 처음 검찰 개혁을 논할 때에는 해체까지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야 간 네 번의 정권교체와 세 번의 민주 계열 정당의 대통령이 배출되는 사이 검찰과 민주당의 ‘악연(惡緣)’은 깊어져 갔고, 결국 해체 카드를 꺼내들었다.
민주당이 검찰 개혁을 외칠 때마다 검찰은 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줬다. 살아있는 권력의 한가운데를 파고들며 정권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심지어 검찰 출신 인사가 보수 계열 정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 정권 교체에 성공하기도 했다. 모 검사는 “마치 ‘검찰은 보수’라는 프레임이 공고해지지 않았느냐”고 말할 정도로 검찰과 진보 진영 간의 대치는 팽팽하게 이어졌다.
‘대화’ 시도했던 盧… 검찰의 반격과 몰락
한국 사회에서 검찰 개혁이란 의제를 본격적으로 들고나온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검찰의 수사권 조정을 포함한 개혁 과제를 포괄적인 공약으로 제시했다. 기존부터 ‘과도한 권한을 가졌다’는 그의 문제의식 아래 검찰은 본격적으로 ‘개혁 대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정부와 검찰이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정부 출범 직후 법무부 장관 인선이었다. 당시 여성 최초의 민변 부회장 출신인 강금실 변호사가 최연소이자 여성 최초로 참여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깜짝 발탁된 까닭이다. 이전까지 기수와 서열을 중시해왔던 법조계의 50년 관행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강금실 장관 임명이 가져온 검찰 내부의 후폭풍과 반발은 결국 2003년 3월 9일 진행된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취임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진행된 검사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 이미 파격적이었다.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 평검사들과 검찰 인사권 등을 두고 ‘토론’을 벌인 것이다. 당시 노 전 대통령과 강 전 장관은 기존에 막강했던 검찰 수뇌부의 힘을 빼고 개별검사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에 대해 평검사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취지로 토론을 기획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날 평검사들의 태도는 청와대의 기대와 세간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미 평검사들은 검찰이 무시당한다는 조치로 해석하기 바빴으며, 급기야 검찰의 구심점이자 정점인 검찰총장에게 인사권을 이양하라는 요구를 노 전 대통령에게 하기도 했다. 결국 대통령과 평검사들 간의 토론은 온데간데없어진 가운데, “(노 전) 대통령께서 83학번” “이쯤 가면 막 하자는 거지요” 등 서로의 발언만 회자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대화는 실패했으나 강 전 장관을 중심으로 정부의 검찰 개혁 의지는 여전했다. 강 전 장관은 그해 9월 모 인터뷰에서도 “검찰 개혁의 요체는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 엄정하게 수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는 데 있다”며 포부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말 당시 노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지사가 각각 구속되면서 참여정부의 검찰 개혁 동력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좌(左)희정, 우(右)광재’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정권의 핵심 실세였던 두 사람이 검찰에 의해 무너지면서, 노 대통령 역시 정권 초반처럼 강하게 검찰 개혁을 밀어붙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후 2004년 1월 검사 동일체 원칙을 법적으로 폐지하기도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뚜렷한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보수 진영에 정권을 넘겨줬다. 정권교체 이후 검찰은 이른바 ‘박연차 게이트’를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결국 노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지면서 검찰에 대한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뀌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검찰은 노골적으로 보수 정당 편에 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에 대한수사가 이런 평가의 근거다. 당시 검찰은 이 후보의 도곡동 땅, 다스 차명재산, BBK 주가조작 의혹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대선 한 달 전 검찰은 핵심 인물인 김경준 전 BBK 대표를 구속하고 “이 후보와 BBK 사건은 무관하다”고 결론을 냈다. 도곡동 땅에 대해서도 “제3자의 것으로 보인다”는 애매한 결과를 도출하면서 오히려 이 후보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훗날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스 실소유주이며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점이 인정되면서 당시 검찰의 수사가 온전치 못했다는 방증이 되기도 했다.
‘수단’ 썼던 文… 공수처·검수완박 모두 좌초
‘검찰 개혁’은 10여년이 지난 2017년 참여정부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다시 한번 주요 개혁 과제로 떠올랐다. 그는 2011년 김인회 인하대 로스쿨 교수와 함께 쓴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란 책에서 “검찰이 비교법적으로 유례없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권력이 공정하게 행사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주면 민주화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었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라고도 평가했다. 그는 “검찰이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정치권력의 도구로 국민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고도 했다. 결국 문 전 대통령은 “검찰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없으므로, 국민과 정치권이 나서서 검찰을 견제하고 감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후에 낸 자서전 ‘운명’에서도 다시 한번 검찰에 대해 언급했다. 문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권력과 검찰의 복수극’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이 증거 없이 박연차 회장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를 진행했으며, 언론을 통해 망신을 주는 등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출범한 만큼 검찰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어느 정도 등에 업고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내든 카드는 바로 ‘검찰 폐지론자’인 조국 당시 서울대 교수의 민정수석 임명이었다. 이어 문 전 대통령은 친구였던 노 전 대통령처럼 정권 초반부터 곧바로 검찰 개혁을 밀어붙였다. 이미 참여정부 시절 검찰 개혁의 장애물을 겪고 검찰의 폐해를 깊게 인식했던 문 전 대통령의 개혁 의지는 여전했다. 참여정부의 취지와 의도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경우 접근 방식에서 차별화를 뒀다. 대화를 시도했던 노 전 대통령과 달리 문 전 대통령은 수단적인 대응에 나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수단은 집권 3년여 만에 출범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였다. 검찰의 기소 독점을 견제하기 위한다는 취지로 장기간 논의 끝에 설립된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 출범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뒤따랐다. 특히 국회 입법과 통과 과정에서 난항을 겪었다. 더 큰 문제는 출범 이후에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사 실적이 부족한 것은 물론, 검찰이나 경찰과의 역할이 중복 또는 충돌하면서 교통정리조차 안 된 실정이었다.
여기에 더해 소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이라고 불린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는 정부와 검찰 간 알력 다툼을 더 키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검수완박도 단순히 검찰의 힘을 빼겠다는 취지에 들어맞지 못했다. 섣부른 시행은 민생사건에 대한 수사 지연을 낳기도 했으며 오히려 갈등만 고조시켰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수사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기소 및 공판 업무를 전담한다는 측면에서 검찰 내부를 비롯해 반발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민정수석이었던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 역시 검찰의 반발에 아주 좋은 땔감이었다. 문 대통령이 조 장관을 지명한 직후부터 ‘자녀 입시비리 의혹’과 아내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와 관련한 사문서 위조, 탈세 등의 의혹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검찰 입장에서도 살아있는 권력이자 자신들의 수장이 될 인물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이른바 ‘추-윤(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갈등’으로 이어진 모습은 문재인 정부와 검찰의 강 대 강 대치의 끝판왕이었다.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은 아예 추미애 장관을 향해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는 말로 행정부 소속임을 거부했다. 문 대통령이 2021년 신년사에서 “윤석열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며 장기간 대립을 사과했으나 갈등은 봉합되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 내부와 정부 간의 불신이 커지는 모양새였다. 앞서 모 검사는 “그때 일부 검사들은 파업이라도 할 기세였다”라고 회상했다.
갈등의 정점에 있었던 윤석열 검찰총장은 결국 문 대통령의 발언 두 달여 뒤인 2021년 3월 “법치 파괴를 두고 볼 수 없다”며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윤 총장은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수단’이었던 ‘검수완박’에 대해 “부패완판(부패가 완전히 판치게 된다)”이라고 비판하며 정면으로 부딪쳤다. 당시 문 대통령 역시 1시간여 만에 윤 총장의 사의를 수리하면서 갈등은 절정에 달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를 때리며 ‘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으며 ‘고속 승진’한 윤 총장은 불과 1년 뒤인 2022년 대선에서 ‘보수 정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5년 내내 검찰을 개혁하려 했던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을 배출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윤 전 대통령의 폭주에 대한 문 전 대통령의 원죄론을 꺼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당했던 李…‘전격 해체’ 카드 꺼내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를 거치며 민주 계열 정당이 바라던 검찰 개혁은 실패했다. 또 두 정부는 모두 보수 진영에 정권을 헌납하면서, ‘검찰 개혁은 정권 재창출을 할 수 없다’는 공식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런데 ‘재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앞서 두 전직 대통령이 추진했던 검찰 개혁을 넘어 ‘검찰 해체’를 강행했다. 시기적으로 취임 10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패배한 직후부터 곧바로 ‘사법 리스크’에 빠졌다. 검찰은 이 대통령에 대해 수사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 결과 이 대통령은 야당 대표 당시 5개 재판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소위 ‘털릴 대로 털린’ 이 대통령의 입장에서 검찰 조직에 대한 강한 드라이브는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검찰의 반응도 이번에는 달랐다. 그간 참여정부 당시 대통령에게 정면 반박하거나 문재인 정부에 검찰 수장이 반기를 드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왔던 검찰이지만, 이번의 경우 공개적인 성토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이미 지난 20대 대선을 전후로 검찰 안팎을 막론하고 검찰청 폐지와 공소청 설립 등에 대한 움직임이 생겨난 변화도 일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을 해체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라면서도 “‘할 만큼 했다’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어쩌면 운명처럼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국민적 여론도 한몫하는 분위기다. 탄핵 이후 윤 전 대통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봐주기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검찰 개혁에 대한 필요성이 강해진 것이다. 모 헌법학자는 “검찰은 수사권이라는 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데, ‘내란죄’ 혐의를 받는 검찰 출신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으면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보겠느냐”라고 꼬집기도 했다.
결국 이재명 정부는 지난 9월 7일 확정된 정부조직 개편안을 통해 내년 9월 검찰청을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핵심은 검찰의 공소권과 수사권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기존에 검찰이 갖고 있던 공소 제기 및 유지 권한은 법무부 산하 ‘공소청’으로 넘겨지며, 수사 권한은 행정안전부 산하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넘겨지게 된다.
이재명 정부의 ‘검찰 해체’는 곧 노무현, 문재인 두 전직 대통령이 추진했던 ‘검찰 개혁’의 완결편을 뜻하기도 한다. 참여정부는 ‘대화’를 통해 검찰 내부의 설득을 시도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공수처와 검수완박 등 ‘수단’을 통해 검찰 개혁에 더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으나, 이 역시도 좌초됐다. 결국 이재명 정부가 택한 방식은 해체였다. 민주 계열 정당 대통령들의 검찰 개혁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됐으며, 검찰청은 창설 7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