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이곳엔 전날 밤 시간당 100㎜에 달하는 ‘물 폭탄’이 쏟아졌다. 주민 3명이 산사태로 숨졌다. 현장은 흙더미뿐이었다. 집은 형체도 없었다. 대신 집채만 한 바위가 뒹굴었다. 전신주도 쓰러졌다. 비는 그쳤지만 흙탕물이 폭포수처럼 콸콸 흘러내렸다.
산청엔 지난 16일 이후 닷새간 전국에서 가장 많은 793.5㎜ 폭우가 쏟아졌다. 작년 한 해 내린 강수량의 절반 이상이 닷새 만에 쏟아진 것이다. 피해도 제일 컸다. 산청에서만 10명이 숨지고 4명이 실종됐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산청은 골짜기가 깊고 가팔라 산사태 피해가 특히 컸다. 산청군 관계자는 “지난 3월 산불로 입은 상처를 채 치유하기도 전에 또 화를 당했다”며 “군 전체가 초상집”이라고 했다. 지난 3월엔 지리산 자락인 산청군 시천면 일대가 산불 피해를 당했는데 이번엔 산청읍 일대가 수해를 당했다.
주민 최모(92)씨는 “‘우우우’ 하며 땅이 울리다가 산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는데 아흔 넘게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3년 전 귀촌한 노명수(70)씨는 가까스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는 “거대한 산이 내 앞으로 밀려오는 느낌이었다”며 “집 근처 둑 위로 피해 겨우 살았다”고 했다.
숨진 10명 중 2명은 부부였다. 전날 밤 소를 돌보러 갔다가 흙더미에 매몰됐다. 김광만(61) 이장은 “마을에서 제일 금슬 좋은 부부였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산림청은 산불이 난 시천면 일대는 ‘산사태 취약 지역’으로 지정해 관리했지만 산청읍 일대는 취약 지역에서 빠졌다. 이 때문에 주민 대피가 늦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지난 16~20일 집중호우로 전국에서 총 17명이 숨지고 11명이 실종됐다.
강력한 비구름이 16~17일 충남을 강타한 데 이어 광주광역시와 산청, 경기 가평 등에 집중호우를 뿌렸다. 가평에선 20일 오전 10시간 동안 197.5㎜ 폭우가 쏟아져 2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이날 오전 4시 21분쯤 가평 조종천 대보교 부근에서 남성 1명이 물에 빠져 숨진 채 발견됐다. 오전 4시 37분쯤에는 가평 조종면 신상리에서 산사태가 나 주택 3채가 무너졌다. 70대 여성 1명이 매몰돼 숨졌다.
기습 폭우가 피해를 키웠다. 주민들은 “가평에 이렇게 많은 비가 내릴 줄 몰랐다”고 했다. 기상청도 전날 “20일까지 경기 북부 지역에 최고 80㎜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다. 경기도 관계자는 “계곡을 따라 펜션, 캠핑장이 몰려 있어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번 집중호우로 전국 86개 시군구에서 1만3400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농경지 2만4247㏊가 물에 잠겼다. 축구장 3만4000개 크기다.
국가유산 피해도 잇달았다. 울산에서는 국보 ‘반구천 암각화’가 물에 잠겼다. 지난 1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7일 만이다. 산청에서는 보물 율곡사 대웅전이 산사태로 파손됐다.
단전·단수도 속출했다. 닷새간 폭우로 전국 3만8000가구가 단전 피해를 당했다. 울산 울주군에서는 상수도관이 파손돼 약 3만5000가구, 6만8000여 명에게 수돗물 공급이 중단됐다.
폭우로 차질을 빚었던 열차 운행은 교외선(의정부~고양)을 빼고 전부 정상화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호우 피해 지역들을 조속히 특별 재난 지역으로 선포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