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징역 3년을 마치고 만기 출소했습니다. 수거(收去)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안타까운 사연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보이스피싱범이 되어 실형을 살고 나온 한 20대의 이야기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A씨는 2022년 초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 A씨의 역할은 피해자들을 만나 돈을 직접 전달받는 ‘수거책’이었으며,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보이스피싱인지도 몰랐다. 몇 차례 돈을 받고 전달하기를 반복하고 나서야 A씨는 ‘내가 보이스피싱 가담자구나’ 싶었다고 한다. 결국 일을 시작한 지 4개월여 만에 경찰에게 붙잡혔다. A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사기’ ‘공문서·사문서 위조’였다.
“다들 욕할 것을 압니다.” 사기를 저지른 그는 자신을 감싸달라는 의도가 없다. 반성한다는 의미였을까? 그는 기자의 취재 요청에 응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은 보이스피싱 범죄의 내막을 풀어놓았다. “피해자분들에겐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사죄합니다. 또 이 순간에도 가담하고 있는 이들이거나 혹시 가담할 수 있는 이들에겐 저처럼 되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구직 앱’에 건설 현장 일용직 공고
개인 사정으로 생활고를 겪던 A씨는 2022년 초 한 구직 플랫폼을 통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건설 현장 일용직’ 공고는 임금이 꽤 높게 책정됐다. 곧바로 공고를 눌러 지원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대면 면접을 거쳤다. 이후 업체 담당자로부터 합격 소식이 담긴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A씨는 업무 배치 과정에서 담당자로부터 배려받는 느낌도 들었다. 그가 “허리가 좀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 하자 담당자는 “그럼 편하게 거래처를 이동하면서 돈을 받을 수 있게끔 업무를 정해주겠다”고 했고, 최종 업무는 ‘정해준 사람과 만나 상대가 주는 돈을 받기’였다.
A씨는 “신중하지 못했다”면서도 “먹고살기 궁하니 ‘이상하지만 이거라도 해야 되겠다’ 싶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결국 A씨는 일하기로 결심하고 ‘돈을 수거하는 일’을 맡았다. 사람을 만나 돈을 받고 동료에게 전해주거나 특정 ATM기기에 가서 입금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전형적인 보이스피싱 수거책 또는 전달책의 일이었다.
A씨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조직의 체계는 ‘상책(또는 총책)’을 시작으로 ‘중간책’, 그리고 ‘하범(또는 하책)’으로 구분된다. 상책은 중국 등 국외에 있는 보이스피싱 총책들을 일컫는 말이며, 중간책은 흔히 알려진 ‘콜센터 직원’ 같은 이들을 뜻한다. 가장 아래인 ‘하(下)범’은 A씨가 담당했던 수거책을 포함해 인출책, 전달책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수거책은 직접 피해자를 만나 그들이 준비한 현찰을 받아오는 역할이며, 현금을 받은 이들은 돈을 상부에서 정해준 계좌로 입금한다. A씨는 “내가 만약 여의도에서 돈을 받았는데 다른 수거책이 종로에 있다고 한다면, 종로로 넘어가서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출책은 피해자가 직접 송금하는 경우 그 돈을 계좌에서 빼오는 역할이며, 전달책은 동료로부터 현찰을 받아 상부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수입은 피해 금액의 2%”
구체적인 범죄 과정에서 택시비 등 이동 비용은 상부에서 제공한다. A씨는 “최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무조건 항상 택시를 타고 이동하라고 지시한다”며 “수금을 위해 서울에서 강원도 강릉까지도 가봤다”고 털어놨다.
흥미로운 점은 상부가 조직적으로 각 수거책을 감시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어느 날 현금 수거를 위한 피해자와의 약속이 몇 시간 미뤄진 상황에서 A씨는 잠시 한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음식이 나오자 상부에서 “피해자가 도착했으니 빨리 이동하라”는 명령이 텔레그램 메시지로 하달됐다. “화장실만 들렀다가 가겠다”고 보고하고 한 숟갈이라도 더 들려던 찰나, A씨에게 추가로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A씨, 지금 먹는 거 내려놓으세요.” A씨는 “이때부터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조직은 A씨가 퇴근 후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찍어 보내기도 했으며, 그가 업무 중 택시로 이동할 때에도 또 다른 택시를 이용해 미행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추정했다. “혹여나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지 않을까 싶어 그러는 것 같았다.”
거둬들인 현금을 정해진 계좌에 입금하거나 또 다른 전달책에게 입금하는 과정을 마치면, 가장 ‘하범’인 수거책의 역할은 끝이 난다. A씨는 마지막 단계에서 수익을 챙긴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피해액 중 2~4% 정도를 수거책이 챙기고, 나머지 금액을 ATM기기를 통해 송금하거나 동료에게 전달하는 형태다. A씨는 “만약 피해액이 1억원인 상황이라면, 피해자에게 받은 현찰 1억원 중 200만원을 내가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보내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총 2억8000만원 상당의 피해액을 17차례에 걸쳐 수거했으며, 그중 800만원의 수익을 챙겼다.
다만 A씨는 중간책 내지는 상책 조직원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범’인 그는 자신과 유사한 역할을 맡은 수거책이나 전달책 등만 몇 차례 마주친 것이다. 모든 연락은 텔레그램을 중심으로 진행됐으며, 이따금 텔레그램 통화를 통해 지시가 내려오기도 했다.
수사 시작되자 “핸드폰 버리고, 잘 버텨라”
일을 시작한 지 4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A씨는 서울의 한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사기 혐의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면서부터 수도권 곳곳의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황당한 점은 이 무렵 상책의 반응이다. A씨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상책은 “안심하라”고 했다. 이어 A씨는 담당자로부터 이 같은 말을 들었다. “그냥 쓰는 핸드폰 버리시고요. 잘 버텨봅시다.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 대화가 A씨와 상책 누군가가 주고받은 마지막 텔레그램 메시지였다.
A씨는 스스로를 “이미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고 표현했다. 이 시점에서야 A씨는 보이스피싱을 멈췄다. 더는 상책으로부터 명령과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한다’는 심정으로 2~3주 정도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던 A씨는 결국 얼마 안 가 체포됐다. 그렇게 그의 범죄는 마무리됐고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흔히 ‘범행을 저지른 이들도 나쁘지만, 당한 피해자들이 멍청하거나 부주의해서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다. 당할 수밖에 없다.” A씨는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특히 휴대폰 해킹을 지적한다. “말로는 예방하고 대비한다지만, 요새는 휴대폰이 해킹당하면 112에 전화하거나 검찰에 전화를 걸어도 다 그들에게 연결된다. 앱을 깔려고 하는 순간 바이러스도 심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보니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기술은 발전하고 있지 않나. 이 조직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기술에 뒤처지지 않는다.”
A씨는 대출 사기형 사례도 들었다. 그에 따르면 대출 사기형의 경우 “우리는 일반 은행보다 지금 더 싸게 해줄 수 있다”는 식으로 저금리를 미끼로 피해자를 노린다. A씨는 자신이 만난 피해자들에 대해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갖가지 방법을 통해 속임을 당한 피해자들은 직접 현금을 송금하거나 수거책에게 돈봉투를 건넨다. 결국 A씨에게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고 재판 결과 징역 3년이 확정됐다.
A씨는 피해자들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미안하다”고 반복했다. 그는 “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니까, 평생 반성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말도 이어갔다. ‘현재 보이스피싱에 가담하는 누군가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담담히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하는 일이 의심되면 자수해야”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의심이 되는 경우라면, 지금이라도 본인 발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연루가 돼 있다 싶으면, 자수를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형량을 적게 받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억울하다’ ‘자기는 몰랐다’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맞다.” 국내에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총책에 대해 묻자, A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뿌린 대로 거둔다고, 꼭 언젠가는 한 만큼 될 것이니라”라고 운을 뗐다. 이어 “너희가 그렇게 버는 검은돈. 유독 그런 돈은 참 빨리 사라지지 않느냐”라며 “계속 그렇게 살아라. 언젠가 네가 그렇게 죽을 테니까. 저는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덧붙였다.
최근 경찰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총 5878건이다. 하루 평균 49건에 달하는 피해가 속출하고 있으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 증가한 수치다. 피해자 1인당 평균 피해액도 3000만원을 넘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보이스피싱범이 전국을 누비고 있으며, 그들에게 명령하고 조종하는 조직 상부의 총책도 어디선가 존재한다. 그러나 총책까지 ‘뿌리 뽑기’란 까마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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