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 2025' 부산관.

지난 8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5′ 전시장 중 하나인 LVCC(라스베이거스 컨벤션 및 세계무역센터) 센트럴. 부산의 전시기획사인 리컨벤션 직원 신인화(28)씨가 삼성전자 부스 등을 돌며 열심히 관람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 규모 메카 이벤트인 CES는 홍보를 어떻게 할까 살펴 보러 왔어요.”

신씨는 부산외국어대 ‘글로벌 마이스연구소’의 글로벌 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에 선발돼 CES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CES 같은 행사를 부산에서 개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조사하고 배우는 게 이 프로그램의 취지”라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에 선발된 사람은 모두 5명으로 행사의 차별성, 부스 조성과 운영 방식, 홍보 체계 등 5개 분야를 각자 맡아 현장에서 취재하고 조사, 분석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들은 지난 6~12일 라스베이거스에 머물면서 CES 현장과 참석자, 행사 운영자 등을 둘러보고 인터뷰했다.

부산이 ‘CES 벤치마킹’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학 연구소만 아니다. ‘CES 2025′에 사상 최초로 마련한 독자 전시관에 역대 최다인 23개의 지역 기업이 참가한 부산은 시와 부산테크노파크, 벡스코, 부산경제진흥원, 부산정보산업진흥원,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 부산상의 등 관련 기관들이 대거 CES로 출동했다.

성희엽 부산시 정책수석보좌관은 “이번 CES에 부산시와 다양한 산하 기관들이 대규모로 참관에 나선 것은 지역 기업을 지원하려는 취지도 있지만 CES를 입체적으로 벤치마킹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말했다.

지역 참가 기업 및 참관단을 이끌고 이번 CES를 다녀온 박형준 부산시장은 귀국 후 “AI(인공지능)가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큰 물결이 됐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AI를 지역 산업과 시정에 어떻게 접목하고 확장시킬 것인지 방안을 마련하고, CES 벤치마킹을 통해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가는 모멘텀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지난 7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 CES 전시장에서 '부산관' 개관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 가운데 박형준 부산시장과 킨제이 파브리치오 CTA회장(빨간색 재킷 입은 이)./박주영 기자

CES는 1967년 미국 뉴욕에서 TV·오디오·백색가전 등 가전제품 전시회로 시작, 시카고를 거쳐 1995년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했다. 처음엔 미국 서부에서 열리는 큰 가전제품 전시회쯤이었으나 2010년대 가전제품들이 ICT(정보통신) 기술과 결합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변화에 적극 대응, 세계 최대의 IT·전자 기술 및 제품 전시회로 성장했다.

‘미디어 & 콘텐츠’, ‘스타트업’, ‘비즈니스와 엔터프라이즈(Business & Enterprise) 플랫폼’ 등으로 외연을 확장하고 2015년 주최 기관의 명칭을 ‘CEA’(미국소비자가전협회)에서 ‘CTA’(미국소비자기술협회)로 바꿨다. 전시 대상이 가전제품·기업만이 아니라 전기자동차·자율주행차 등 미래 자동차와 드론, 인공지능(AI), 로봇 등 ICT 분야의 최신 기술·기업·제품으로 변모했다. 올해는 양자컴퓨터 분야까지로 확장됐다.

CTA 집계에 따르면 ‘CES 2025′엔 세계 160여국의 4500개 이상 기술기업들이 참여하고 14만1000여명 이상이 참관했다. 160여국이면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들이 참가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드론 기술 등을 선보이는 부스를 운영했다.

행사 기간(1월7~10일)인 4일 동안 CES 참가 및 방문자 수는 라스베이거스 인구 64만여명의 20%가 넘는다. 벨라지오, MGM그랜드, 베네치안, 시저스 팰리스, 플라밍고 등 도심 호텔들은 전시회 동안 모두 동이 나고 방값도 평상시의 2~3배 이상 올랐다고 한다. 몬 아미 가비, 인앤아웃 햄버그, 허니피그 등 거의 모든 음식점들은 줄을 서야 했다. CES 참가자들은 대부분 기업가, 사업가들로 그들 1명이 일반 관광객보다 3~5배 정도 많은 돈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CES 4일 동안 라스베이거스 시(市)가 얻는 경제적 효과는 공식적으로 2억1000만달러(약 3000억원·라스베이거스 컨벤션관광청 발표) 정도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4100여 기업들이 부스를 빌리고 꾸미는 비용만 3000억원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는 게 현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지난 8일 오전(현지시각) 'CES 2025' 전시장 중 하나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시 베네시안 엑스포 출입구에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박주영 기자

김연순 UNLS(네바다대학교 라스베이거스) 호텔관광학과 교수는 “CES의 경제적 효과는 전시회 참가 및 부스 운영, 제조사와 바이어간 판매 계약, 호텔, 음식, 교통, 관광, 엔터테인먼트 등 직·간접적 요인을 고려하면 1조~2조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며 “연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3000여개의 주요 회의·전시 등 행사 중 CES의 비중은 전체의 20~30%쯤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CES의 성장, 성공은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도시, 라스베이거스는 1980년대까지 수입의 85%가 카지노에서 나오는 환락, 관광의 도시였지만 요즘은 70% 이상의 수익을 CES 등과 같은 MICE(회의·관광·컨벤션·전시) 산업이 창출하는 도시로 탈바꿈했다.

김연순 UNLS 교수는 “CES는 라스베이거스를 혁신 기술의 세계적 중심지로 자리잡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부산의 전시기획회사인 리컨벤션 이봉순(63) 대표가 CES 전시장을 바삐 둘러보고 있었다. 이 대표는 “매년 1월 초 열리는 CES는 그 해 세계의 여러 트렌드를 한 눈에 볼 수 있고 당대 최고 거장들의 안목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소”라며 “새로운 사업 구상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어 5~6년 전부터 새해를 CES에서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CES 2025' 의 SK관 전경.

CES 전시회에 참가, 부스를 운영하는 것 말고 단순히 전시장을 둘러보고 각종 회의나 강연 등에 참석하는 ‘참관’에도 그 범위에 따라 200만~400만원을 내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표는 “전시장을 둘러 보면서 첨단 기술을 보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해를 높이고 세계 최고 강사의 살아 있는 ‘MBA 강의’에서 변화하는 세상, 시장을 향한 통찰을 얻는다고 생각해보라”며 “CES는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은 물론 오지 않으면 뒤처질 거란 초조감마저 갖게 만든다”고 말했다.

CES가 현재 인류 사회에서 가장 앞선 혁신 기술과 그 트렌드를 제시하고 그 지식과 경험에 대한 당대 최고 구루(Guru, 현인·스승)들이 기조 강연·연설을 하게 한 것 등이 성공의 기반이 됐다는 얘기다.

‘CES 2025′ 개막을 하루 앞둔 지난 6일(현지시각) 1만4000여석을 꽉 채운 가운데 진행된 세계 최대 AI반도체 공급업체인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 기조연설은 한국 등 세계 언론들이 비중있는 기사로 다뤘다.

'CES 2025'의 우크라이나관.

“AI는 앞으로 모든 것의 일부가 될 것이다. ‘생성형 AI’ 시대 다음은 ‘피지컬 AI’ 시대다. 범용 로봇을 위한 ‘챗GPT 모먼트’가 막 다가오고 있다”는 등 그의 연설은 CES의 어떤 전시장보다 더 주목을 받았다.

지난 8일 CES 전시장에서 만난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플러그앤플레이’ 본사 데이비드 김 이사는 “CES는 2010년대 중반 이후 혁신 기술과 이슈를 선점하고 매년 트렌드를 주도하는 글로벌 IT·테크 기업 리더들의 기조연설로 권위와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세계 최대의 기술 전시회로 우뚝 섰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바탕엔 당초 출발점이었던 가전제품에서 디지털테크, AI, 모빌리티, 드론 등 다양한 기술 분야로 전시 콘텐츠를 확대해 나간 CES의 전략적 선택이 깔려 있었다. 이 전략적 선택은 CES 행사를 여는 주최 측인 민간기관 CTA의 통찰력 혹은 촉, 감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015년 자신의 이름을 CEA에서 CTA로 바꾼 것부터가 그렇다.

지난 9일 오전(현지시각) 라스베이거스 베네시아호텔 전시장 통로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AI 등 급격한 기술혁명의 험난한 물결을 헤쳐나가는 방안들을 제시하는 ‘방향을 바꾸거나 아니면 죽거나'(Pivot or Die)란 책의 저자 게리 샤피로(Gary Shapiro)로부터 책 사인을 받기 위한 인파였다.

급변하는 기술혁명 시대에 기업이 살아 남고 번영하는 방안들을 담은 책 '방향을 바꾸거나 아니면 죽거나(Pivot or Die)'의 저자 게리 샤피로가 지난 9일 오전 CES 전시장 통로에서 책 사인회를 갖고 있다. /박주영 기자

샤피로는 이 책의 저자로 ‘닌자 혁신' 등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CTA의 최고경영자(CEO)다. 그가 낸 책들은 대부분 AI, 양자컴퓨팅, 로봇공학, 몰입형 기술 등 전례 없는 속도의 기술 발전, 변화에 적응하고 번영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통찰들을 담고 있다.

새롭고 의미있는 변화와 흐름을 읽어내고 포착하는 CTA의 ‘감'과 ‘촉’은 이런 리더들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김은 “기술 발전과 변화의 흐름을 읽으며 5G, 스마트시티, 블록체인, AI, 인간안보, 우주기술, 양자컴퓨터 등 경계 없는 전시회로 진화한 것이 CES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글로벌 투자자와 미디어, 참관객 등의 네트워킹과 시너지를 통해 비즈니스 선순환 구조를 형성, 기술 기업들이 CES를 단순 전시회가 아닌 효과적인 홍보 및 투자 확보 플랫폼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CES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한 해가 시작하는 1월 초를 행사 시기로 정한 ‘타이밍’, ‘시간 선택’도 성공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매년 CES를 찾아 신년 사업 구상을 한다는 이봉순 리컨벤션 대표처럼 새해 벽두에 그 해 트렌드의 특성, 방향을 가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부응한다는 것이다.

7일 라스베이거스 '스피어'에서 열린 에드 배스천 델타항공 CEO의 기조연설에 대한 안내문.

개최도시의 ‘합심’도 CES 성공의 한 요인이란 분석도 있다. 이번 CES를 참관한 벡스코 정유진 대리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CES 배지’ 수령처가 있고 호텔, 대형 빌딩 등 전광판에 CES 안내 홍보 영상들이 끊이지 않는 등 도시 전체가 CES를 위해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CES 배지’를 목에 걸고 택시를 타거나 음식점·커피숍 등에 들어가면 외국인이지만 경계하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줘 뭔가 인정받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좋았다”고 말했다.

부산외국어대 ‘글로벌 마이스연구소’의 글로벌 전문인력 양성프로그램에 선발돼 CES 현장조사에 나선 신인화씨 등 5명은 지난 23일 보고서를 작성해 연구소 측에 제출했다.

부산시는 박 시장 지시에 따라 ‘CES 2025′ 참여 후 그 결과와 성과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이를 토대로 다음 달 중 성과보고회를 가질 예정이다. 또 시정 전반을 AI와 접목시켜 재편하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 종합계획은 오는 3월쯤 발표될 계획이다.

성희엽 부산시 정책수석은 “CES 벤치마킹을 통해 산업뿐만 아니라 문화, 관광,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산이 글로벌 허브 도시로 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CES를 둘러보고 온 김형균 부산테크노파크 원장은 “CES에서 AI·로봇·양자컴퓨터 등 현대 인류의 첨단기술을 실물로 만나고 그 흐름을 살펴볼 수 있었다”며 “이번 참관 내용 분석과 성찰을 통해 지역 산업, 기업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