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살고 있어요. 새로 누가 들어올 수는 없고요. 다들 당장 어디 갈 돈도 없고, ‘깔고’ 사는 거죠.”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 이재호씨)
경기 수원시 세류동은 일대 사회초년생들이 처음 독립해 보금자리를 찾아드는 곳이다. 이곳엔 주변 공군 비행장 탓에 대규모 재개발 대신 다세대 빌라촌이 조각조각 들어서 있다. 근처 번화가보다 임대료가 저렴하고, 멀지 않은 곳에 삼성전자 본사가 있다. 이 때문에 수원 외곽 중소기업으로 출퇴근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금융 및 부동산에 취약한 이 사회초년생들이 범죄의 대상이 됐다. 이 동네는 1년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에 무방비로 당했다.
사건 1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사회초년생인 피해자 대부분은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 작년 5월 제정된 전세사기특별법(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의 적용을 받지만, 전세금을 반환받기 어려운 상황 속 피해 주택을 일단 ‘깔고’ 사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 피해자들은 여기에다 “갭투자 아니었느냐” “세입자가 꼼꼼하지 못했던 탓을 사회가 왜 배상하느냐”는 여론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수원 전세사기는 그보다 일찍 터진 인천 미추홀, 서울 강서구 등지의 전세사기보다 더 치밀하게 공모한 세력에 의해 당했다는 특징이 있다. 사실상 임대인과 중개사가 공모, 임차인들을 완벽히 속인 ‘작전’이었다는 것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현재까지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는 511명, 피해액은 800억원에 육박한다. 이런 와중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이 11월 11일부터 시행됐다. 기존의 특별법이 피해자 구제책으로서 큰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 끝에 여야 합의로 올 8월 통과된 법안이다. 주간조선이 만난 임차인들은 특별법에 한 줌 기대를 걸면서도 “이제는 지쳤다”는 말을 거듭했다.
“경매 끝나기만 기다린다”
지난 11월 13일 오전 세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재호(34)씨는 결혼을 미뤘다.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고,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기 전까지 피해를 본 주택에 계속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수원 대책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한 이씨는 결혼식을 준비하다 팬데믹이 터져 신혼집 겸 전셋집부터 구했다. 그 집이 전세사기범 일가족이 소유한 다세대주택이었다. 2020년 12월 입주한 그는 한 차례 재계약까지 한 뒤, 작년 9월 “집주인이 연락이 안 된다”는 이웃 주민들의 연락을 받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고 한다.
이씨는 ‘쪼개기 담보’에 당했다. 계약 때부터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저당(융자) 비율이 높은 건물은 위험하니 등기부등본을 확인해봤다. 건물 가액에 비하면 융자가 낮았다. 이씨가 입주한 건물은 다세대주택으로, 다가구주택과 다르게 소유권 및 등기가 각 호실별로 나눠져 있다. 그가 입주하는 호실을 포함해 몇 세대가 함께 근저당 설정이 되어 있었는데, 건물 가액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던 것이다. 중개보조원도 “이 건물엔 이 정도밖에 융자가 없으니 안전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해당 주택에는 그런 식으로 수 세대를 묶은 융자가 또 있었다. 이를 합치면 건물가액에 상당하는 수준의 근저당에 해당하는 ‘깡통주택’인 셈이었다. 모든 호실의 등기를 떼어보지 않는 이상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정씨 일가는 이런 식으로 수원과 화성에 다세대, 다가구주택 800여채를 사들인 뒤 대거 근저당을 설정해 전세금을 돌려막았다. 그러다 결국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고 잠적했다.
미심쩍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씨는 “전세금 1억9000만원 가운데 1억원가량이 대출이었다”며 “보증보험도 안 되고, A은행 지점에 가서 대출을 신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했다. 그는 “계약금 1000만원을 이미 입금한 상황이었다”며 “월말 입주를 앞두고 월초에 갑자기 거절을 당해 마음이 급했다”고 했다. 그때 중개보조원이 나섰다. “대출이 되는 은행이 있다”며 화성 동탄에 위치한 B은행 지점의 상담사를 연결해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출이 승인됐다. 이씨는 “이런 경우가 매우 많다”고 했다. 실제 지난 10월에는 충남 천안에서 활동하던 전세사기 일당에게 부당 대출한 새마을금고 지점장이 집행유예 판결을 받기도 했다. 건물의 매매대금이 부풀려진 것을 알고도 25억원을 대출한 것이다.
이제 경매 절차에 들어선 해당 건물엔 15가구가 있다. 이들 모두 보증금을 돌려받을 방법은 사실상 없다. 채권 선순위는 당시 임대인이던 정씨 일가에 건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은행에 있다. 이씨는 “임차인등기를 한 1가구만 빼면 모두 그대로 살고 있다”며 “일단 경매가 끝나기만을 모두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전세사기특별법에 규정된 구제책에 따르면, 이씨를 비롯한 15가구에는 일단 경매가 진행돼야 다음 단계가 열린다. 전세사기 피해자에게 피해 주택에 대한 경매 ‘우선매수권’을 부여하는 것이 제정 당시부터 특별법의 핵심이다. 최고가 낙찰액이 정해지면 그 금액으로 경매 물건을 먼저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선매수권’ 실효성에 갸우뚱
수원 전세사기에서도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살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 이재호씨의 집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정씨 일가 피해 주택이다. 지난 11월 11일 이곳에서 만난 한
주민은 “순전히 우리 돈이라 손해지만 일단 1억2000만원에 낙찰받았다”며 “지금은 전매제한 2년 때문에 있는 것이고, 2년 지나면 팔고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해당 건물 피해자의 절반 정도가 그렇게 이곳에 계속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7월 현재 전국적으로 우선매수권을 사용한 지원 사례는 418건에 그친다. 정부가 인정한 전세사기 피해 사례 2만3000건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이미 전세금 기대출이 있는 피해자들은 경매에 참여하기가 애초부터 어려웠다. 그래서 세입자가 원치 않을 경우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우선매수권을 양도받아 매입할 수 있게 했다. 그 뒤 LH가 피해자에게 임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LH가 피해주택 매입에 적극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에 따르면 우선매수권 양도를 통한 공공임대 매입요청은 7월까지 186건에 그쳤는데, 경매에 낙찰된 모든 주택을 매입하는 것도 아니다.
매입가가 비싸다는 등의 이유로 매입을 거절하기도 한다. 지난 10월 18일 인천 미추홀구에서는 같은 건물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입은 오피스텔 두 채가 경매에 나왔는데, LH는 감정가 대비 57% 가격에 낙찰된 한 채만 매입했다. 안상미 전세사기 피해자 인천 대책위원장은 “다른 한 채도 낙찰가가 감정가의 58% 수준이고 매입가가 700만원 더 비쌀 뿐인데 우선매수권을 포기했다”며 “이유를 물으니 집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런 경우 해당 주택에 대한 권리는 사라진다. 권지웅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장은 이에 대해 “좋은 주택을 저렴하게 사는 게 매입의 목적이 아니다”라며 “피해자의 주거 안정에 맞춘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다가구주택일 경우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건물을 ‘통’으로 매수해야 하므로 우선매수권 행사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인 없는 집, 임차인이 벌금 물기도
11월 11일부터 시행된 개정안에 담긴 대안은 보다 폭넓다. 일단 LH가 우선매수권을 양도받아 경매에서 피해주택을 낙찰받은 뒤, 경매 차익으로 임대료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LH가 2억원에 감정한 주택을 1억원에 낙찰받으면 차액인 1억원을 임대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최대 10년간 임차료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 차액을 받고 퇴거할 수도 있다. LH가 이미 보유한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 살 수도 있게 됐다.
아직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기 전이지만, 이러한 대안이 실효성이 있을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일단 경매가 완료되기까지 시일이 매우 오래 걸릴 확률이 높다. 앞선 ‘쪼개기 담보’로 인해 공동 담보가 걸려있는 경우, 담보로 묶인 모든 가구가 낙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가구 주택의 경우 LH는 거주 가구 중 2인 이상이 피해자라면 해당 주택을 매입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한 가구라도 경매 유예를 신청하면 지연은 불가피하다. 김태근 법무법인 융평 변호사는 “특별법 17조에 의하면 공동주택은 각 피해자들이 경매절차 유예 신청권이 있다”며 “이런 경우 절차가 지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지웅 센터장도 “길게는 경매 완료까지 3~4년이 걸리는 곳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피해자에게 배정될 공공임대주택이 충분할지도 확실치 않다. 공실 추첨에도 이미 상당한 인원이 몰리기 때문이다. 다만 민간임대주택이란 선택지가 생긴 것은 전향적이라는 평가다. 민간임대의 경우 피해 전세금 이하로 집을 구해오면 보증보험을 들고 LH가 전세계약을 대신 맺어준다. 권 센터장은 “전세사기 피해자용 전세임대주택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세사기, 사회 구조적 문제로 봐주길”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 주택에 그대로 살고 있는 가운데, 임대인이 사라진 건물의 관리 상태도 문제로 떠오른다. 경기도 전세피해지원센터가 지난 9월 수원시 거주 전세사기 피해자 69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5%가 하자처리나 유지보수 등 시설물 관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권지웅 센터장은 “수원의 경우 대부분 신축이라 사정이 낫지만, 옹벽이나 외벽 타일이 갈라지는 곳도 있다”며 “무엇보다 임대인의 동의를 받지 않으면 나중에 책임 소재를 따지기 곤란해져 대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특별법에 따르면 피해주택의 안전관리에 관한 비용지원 등은 각 지자체의 조례로 정한다. 이재호씨는 “방치된 건물이 소방안전점검에 걸려 과태료가 임차인에 부과된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주간조선이 만난 피해자들은 전세사기 피해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선이 힘들었다고 전했다. 이철빈 전세사기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자기자본이 없는 사람(임대인)이 (임차인의) 보증금으로 투자하다 문제가 생긴 것이 전세사기의 원인 아닌가”라며 “계약하기 전에 임차인이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규모만 보더라도 개인의 부주의라고만 치부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앞선 이재호씨도 “지금까지 전세사기 피해자 가운데 공식적으로 8명이 사망했고 비공식적으로는 더 많다”며 “실제 피해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오늘내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또 “투자하려고 세류동에 사는 사람은 없다”고도 전했다. 수원 일가족 전세사기 사건의 주범 정씨 부부에 대한 1심 선고는 오는 12월 8일 열린다. 사건이 비화된 지 약 1년3개월이 지난 다음이다.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더 많은 기사는 주간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