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학년도 의과대학 수시모집에 정원 대비 7배 가까운 지원자가 몰린 지난 9월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에 의대 입시 관련 홍보물이 붙어있다. photo 뉴시스

오는 2031년 국내 반도체 시장에는 30만4000명의 인력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2021년 기준 반도체 인력 규모는 17만7000명에 불과하다. 이 규모가 지속될 경우 2031년에는 무려 5만4000명의 반도체 인력이 부족해진다. 연간으로 따지면 약 3000명씩 부족한 셈이다.

K-반도체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맞춤형 인재, 고학력 졸업생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새롭게 성장 중인 시스템 설계 분야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강세인 메모리반도체 분야 등에서 우수 인재 수요가 커졌다. 그러나 이 같은 수요와는 달리 최근 의대 쏠림 현상과 함께 반도체학과의 인기가 떨어지며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대기업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에 대한 관심까지도 시들해진 상황이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4년 정시모집에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추가 합격률은 220%였다. 최초 합격자가 이탈해야만 추가합격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추가합격률이 높을수록 학과의 인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220%라는 수치는 작년 추가합격률(130%)을 크게 웃돌았을 뿐 아니라 연세대 자연계열 정시 평균 추가합격률인 63.2%보다 훨씬 높다. 고려대도 자연계열 평균 정시 추가합격률은 29.8%였는 데 비해 반도체공학과 추가합격률은 이를 훌쩍 뛰어넘는 100%였다.

의대에 밀린 반도체과, 추가합격률 폭증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의대 증원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 정부가 의대 입학 정원을 대거 늘리면서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를 희망하게 됐다는 얘기다. Y 입시학원 관계자는 “반도체과 충원율이 높게 나오는 이유는 최근 대입의 대세인 의치한약수(의과대, 치과대, 한의과대, 약학대, 수의학대 등 거의 모든 대학의 자연계 학과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모집 단위를 지칭) 지원자들과 반도체과 지원자가 겹치기 때문이다. 반도체학과에 등록을 해놓았다가 의대에 합격하면 의대로 가는 경우가 다수다”라고 분석했다.

의대 정원 증원이 본격화한 내년 입시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관측된다. 전병서 반도체IT애널리스트·중국경제금융연구소 소장은 “의대가 최상위권 이과생 2000명을 데려가면 반도체학과 실력은 그만큼 낮아진다. 생산에 참여할 인력들이 연구에 투입되면 대만, 미국 등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된다. 의대 증원 4년 뒤에는 한국이 40년 만에 잡은 반도체 패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동안 국내 반도체 업계가 메모리 중심으로 성장해왔다면, 최근 AI 시장 성장에 따라 설계 및 설계자산 업체들이 첨단 칩 개발에 나서면서 더욱 많은 고급 인력이 필요해졌다. 실제로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학사’ 이상의 인력이 가장 많이 필요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필요한 인력의 규모도 비약적으로 커진다. 2021년 8만1000명인 학사급 필요인력 숫자는 2031년 13만5000명으로 늘어난다. 다음으로는 고졸 인력 3만4000명, 석·박사 인력 2만3000명, 전문학사 인력 1만6000명이 채워져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고학력 연구직 신입 채용이 어려운 상황이다. 20년 가까이 반도체 업체에 근무한 50대 김모씨는 “설계 파트의 경우 업무 강도가 높고 야근이 많다는 인식 때문에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소 설계파트 인력 충원 공고를 내면 사회 초년생은 이력서조차 들어오지 않아 대부분 경력직이고, 들어오더라도 대기업 수준의 연봉을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10월 7일 교육부는 최초로 반도체과 졸업생 전수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2022년 반도체과 졸업생 취업현황’에 따르면 반도체 분야 취업자의 최종 학력은 2년제 전문대학 졸업자 비중이 66%로 가장 컸다. 4년제 대학 졸업 23.3%, 대학원 졸업 10.7%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동안 반도체 공정에 투입되는 실무자를 배출하는 2년제 과정이 반도체과의 주를 이뤄왔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관련 학과의 취업률도 낮아 유인 요인이 없어졌다는 비판도 나온다. 2022년 12월 31일 기준 전국의 반도체 관련 학과를 졸업한 취업자 1198명 중 33.1%(397명)만이 메모리·비메모리, 반도체 소재, 제조용 기계 등의 반도체 분야서 일하고 있었다. 76.9%(801명)는 비반도체 분야로 취업했다.

반도체 인력난에 외국 학생 수입도

그동안 정부는 반도체과 정원을 증원하고 병역특례 등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논의해왔지만, 실효성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앞서 서울대를 비롯해 카이스트, 한양대는 정부 지원을 토대로 지난해 AI반도체 대학원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전문 인력을 충분히 양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력난을 해결하지 못한 서울대 AI반도체 대학원이 올해 반도체 해외 인재 등용 카드를 추가로 꺼내든 것이 이런 어려움을 보여준다. 서울대는 대만 국립사범대, 일본 요코하마국립대를 비롯해 말레이시아, 베트남, 태국 등의 해외 명문대 학생들에게 AI반도체 대학원에서의 교육 기회를 제공해 K-반도체 인재로 키우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분야에서 외국 학생을 데려오는 것은 국내 최초다.

이런 난항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구체적인 계획과 파격적인 유인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9월 발표된 ‘2025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반도체 전 분야 미래인재 양성을 위해서 ‘설계 분야 소규모 특성화대학’을 신설한다. 이는 현재 운영 중인 반도체 계약학과와 비슷한 조건으로 기업과 연결해주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국내 설계 기업은 아직 100여개, 그마저도 직원 50명 이하의 영세한 사업체가 많아 유인책이 될지 미지수라는 의견이 많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의대를 제외한 이공계 전체의 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초·중학생부터 ‘반도체 하고 싶어요’ 소리가 나와야 한다. 의사, 병원 놀이를 쉽게 하듯이 레고를 통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는 등 생활 속 반도체를 의식하게 하고 제조공정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느끼는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기업에서는 반도체 전문가 커리어 패스를 만들어 줘야 한다. 지금은 한국 기업 반도체 분야에 근무하다 보면 나이가 들면서 전문성이 떨어진다. 자연스럽게 젊은 세대에 밀리게 되는데 그런 미래를 알면 어떤 공부 잘하는 학생이 이공계로 가겠나. 미국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엔지니어링, 조합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스템반도체 설계 전문가인 ‘시스템 아키텍트’를 키우고 기업 간에 이 숫자가 경쟁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대만의 경우 거의 모든 대학교에 반도체학과가 있고 학과정원이 늘어나고 있다. 반도체 학위를 가진 인력은 매년 대만에서 1만명, 중국에서 20만명 정도가 배출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될 경기 용인에서 지난 8월부터 ‘양향자 반도체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는 양향자 전 의원은 국내외 반도체 교육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이공계 특히 한국의 반도체 인재 배출 규모가 주요국에 비해 현저히 낮다. 대만에선 이공계 입시가 1년에 두 번이다. ‘국가중점분야 산학협력·인재 양성 혁신 조례’를 제정해 매년 반도체 인재를 1만명 육성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정부 차원에서 대만대·칭화대 등에 반도체 대학원을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 또한 반도체 인재 육성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 많은 기사는 주간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