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 아이를 어린이집이나 유치 원에 안 보내고 가정에서 키워도 양육 수당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한국에서 7년째 거주하는 미국인 A(32)씨를 만났을때 그는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기자는 출산은 커녕 결혼도 멀기만 해 보육정책에 대해 아는게 없었다. “글쎄요, 집에서 키운다고 수당이 안 나 올 것 같진 않은데요....” 벽안의 A씨는 유창한 우리말로 이렇게 대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가정에서 아이를 키울 때만 양육수당을 주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니면 아이행복카드를 줘요. 초등학생은 의무교육 대상이라서 보육비를 따로 지급하지는 않고요.” 외국인의 한국 보육 제도에 대한 지식자랑을 듣자니 국적이 뒤바뀐 듯했다. 대관절 그런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 다. 그는 이것이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한 시험 대비 문제”라고 대답했다. A씨는 서울의 한 IT기업에서 엔지니 어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일자리를 찾아 흘러들어왔지만 역동적인 도시에서 은근한 정을 나누며 사는것이 좋았단다.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 작년부터 영주권 취득을 준비하고 있는데, 영주권을 따려면 숱한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사회통합 프로그램’ 5단계를 이수하는 것이다. 총 465시간의 교육을 듣고 단계별로 총 5 회의 평가를 치른다. 그는 지금 당장 시험을 봐도 좋을 정도로 ‘빠삭하게’ 공부를 마쳤다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런 그에게 “이번달에도 평가가 있는 걸로 아는데, 시험을 보느냐”고 물었다. 그는 뜻밖에도 “소용없다”고 했다.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연간 소득요건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봉이 얼마를 넘겨야 한다는데요?” “거의 1억원이에요.”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한 자격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지적이 계속 해서 나오고 있다. 정책적으로 소득수준이나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을 검증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일본, 독일 등 선진국이 전문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영주권 신청 문턱을 낮추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나 비현실적인 영주권 발급요건으로 젊은 우수 인력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비자, 비자, 비자... “계속 살고 싶을 뿐”
A씨는 처음 E-7 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 E-7은 전문인력 특정활동 비자로, 사실상 한국의 민간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려는 외국인 대부분이 발급받게 된다. 2022년 통계청과 법무부의 조사에 따르면, 해당 비자 소유자의 50% 이상이 5년 이상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A씨는
비자 갱신날짜가 돌아올 때마다 불안 했다고 한다. 거의 매년 갱신해야 했는데 신원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불발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는 것이다.
일단 그다음으로 취득한 것이 F-2- 7 (점수제에 의한 우수 전문인력)비자다. 최장 체류기간이 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A씨가 부여받은 체류기간은 3년이었다. 비자를 갱신할 때 나이, 학력, 기본소양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데 이런저런 사유로 조금씩 감점이 됐기 때문이다. A씨가 영주권(F-5) 을 따기로 결심한 결정적 계기는 ‘나이’ 였다. 그는 3년 뒤 35세가 되는데, 35세 가 지나면서부터 점수가 크게 깎이기 때 문이다.
범죄 이력이 없다면 영주권 취득에 필요한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법무부가 정한 ‘기본소양 요건’과 ‘생계유지 요건’ 이다. 먼저 기본소양 요건은 사회통합 프로그램 5단계를 이수하거나 귀화용 종합 평가에서 60점 이상 득점하는 경우다. 사실 이 사회통합프로그램도 외국인에게는 매우 큰 장벽이다. 문제의 난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입시지옥’ ‘고3병’처럼 한국 언론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단어의 뜻을 고르게 하거나,“‘언제 한번 밥 같이 먹자’ 는 말이 한국에서는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밥을 나눠 먹는 식구처럼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뜻’이라고 구술로 답해야 하는 식이다.
이 문턱을 넘는다 해도 가장 큰 걸림돌이 생계유지 요건이다. 가장 일반적인 경로인 일반영주자(F-5-1) 비자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전년도 1인당 GNI(국 민총소득)의 2배 이상 되는 소득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 한국인 평균보다 두배 이상 벌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3년 1인당 GNI를 원화로 환 산하면 약 4400만원이므로, 올해 영주 권을 취득하고 싶다면 연간 8800만원 이상의 소득을 올려야 한다. 거의 ‘억대 연봉’인 셈이다. A씨는 “한국에서 표현 하는전문직으로 꽤 높은 연봉을 받고있다고 생각했다”며 “그래도 영주권 조건에는 못 미치더라, 그냥 이곳(한국)에 살고 싶을 뿐인데”라며 씁쓸해했다.
이런 높은 소득 기준이 유지될 경우, ‘젊은 잠재적 우수인력’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크다. A씨처럼 20대 중후반 사회 초년생의 입장으로 한국에 오는 이들이 1인당 GNI 2배 이상의 소득을 충족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향후 전문인력으로 한국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인력이다. 영주권 정책의 문턱이 높아 이들을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작년 기준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약 250만명에 달하지만, 영주권자는 18만5000여명에 불과하다.
올해 8800만원 이상 벌어야 취득 가능
고용노동부는 ‘중장기 인력수급 전망’ 을 통해 “‘중간 숙련도’의 인력이 노동력 부족 문제 해소에 기여할 수 있을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도 ‘우수인력’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방향은 ‘고급 전문인력’에 국한 돼 있다. 이를테면 작년부터 ‘과학·기술 우수인재 영주·귀화 패스트트랙’을 시행하며 카이스트 등 특성화기관 석· 박사 학위 취득자에 대해 영주권 취득 절차를 간소화했다. 연구경력이나 실적이 우수하면 국적 부여까지 고려한다. 기존 ‘고액투자자’ ‘특별 공로자’ 등 특별 조항도 있다. 그러나 적용되는 대상은 극소수다.
외국은 어떨까. 독일은 ‘EU 블루카드’를 지닌 외국인은 33개월 후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고, 독일어 평가를 통과하면 기간을 21개월로 단축할 수 있다. EU 블루카드는 대학 학사 학위가 있거나 5 년이상의직업 경력을 증명할 수 있으면서 일정 급여 기준을 충족하면 취득 자격이 주어진다. 독일은 최근 ‘기회 카드’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학사 졸업장과 일정 수준의 언어 평가, 그리고 1만 2000유로 이상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면 발급받을 수 있다. 발급 이후엔 1년간 제한없이 입국과 취업이 가능하고, 정규직 직장을 찾으면 다시 블루카드로 전환이 가능하다. 이민 장려를 위해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췄다고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일본도 작년부터 ‘특별고도인재’ 제도를 통해 연 수입이 기준을 충족하는 전문직은 1년 체류만으로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도록 했다.
앞선 A씨는 거액을 투자할 수 있거나 변호사 같은 자격증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억대 연봉을 벌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알면서, 누구보다 한국에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자신만의 전문적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전문인력’인 것도 분명하다. 언젠가 우리의 이민 정책이 A 씨를 포용할 수 있게 될까. 국회예산정 책처는 작년 11월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제언했다. “고급 전문인력이 아닌 그 외 전문인력 및 중간 숙련인력의 정주화도 국내 노동시장을 보완하고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것으로 보이므로, 현행 비자체계의 소득· 학력 요건 등이 적절한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