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화교들이 서울 수표동 화교사옥 처리문제와 관련해 오는 10월 10일 ‘쌍십절(雙十節)’ 행사 보이콧을 선언하고 나섰다. 10월 10일은 1911년 청(淸)나라를 멸망시킨 신해혁명이 발발한 날로, 신해혁명을 일으킨 쑨원(孫文)을 국부로 삼는 중화민국(대만) 정부는 매년 10월 10일을 ‘건국절’로 기념해 왔다. 주한 대만대사관 격인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도 매년 쌍십절에 앞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재한화교 지도부와 양국 정재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한데 형식상 대만 정부의 지도감독을 받는 한성(漢城)화교협회 등 재한화교 단체들이 화교 고유재산 처리문제와 관련한 대만 정부 측의 미온적 태도에 불만을 품고 쌍십절 행사 불참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재한화교의 쌍십절 행사 보이콧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일각에서는 쌍십절 행사 보이콧을 계기로 대부분 중국 산둥성(山東省)을 뿌리로 하는 재한화교들이 대만과 ‘헤어질 결심’을 한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온다. 이는 재한화교들의 균형추가 대만에서 중국 쪽으로 기우는 일이라 상당한 외교적 후폭풍도 예상된다.
수표동 화교사옥 처리 갈등
대만 정부와 재한화교들의 감정의 골이 패인 것은 서울 수표동 화교사옥 처리문제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면서다. 지난 2014년 화재로 인해 2명이 죽는 사망사고가 난 서울 청계천 수표교 앞의 화교사옥(수표동 11-9)은 등기부등본상 ‘중화민국’이 소유주로 되어 있지만, 구(舊)한말 임오군란(1882) 평정을 위해 출병한 청군(淸軍)과 함께 한반도로 넘어온 재한화교들이 일군 고유자산이다. 1002.7㎡(약 303평) 부지에 올라간 허름한 목구조의 무허가 2층 건물이지만,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어 감정가만 420억원 상당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데 해당 부지의 재개발을 앞두고 신축한 빌딩 지하층을 분양받자는 주한 타이베이대표부와 서울 지역의 다른 빌딩을 대신 받자는 재한화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재한화교들은 코로나19 이후 상권침체 등을 반영해 지하층에 입주할 경우, 임대수입만으로는 막대한 관리비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를 그간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를 비롯해 대만 외교부, 총통부 등 대만 정치권에 꾸준히 전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대만 정부 측은 세금 등 제반 문제를 고려해 신축 빌딩 지하층 분양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급기야 대만 정부의 이 같은 입장에 발끈한 재한화교들이 ‘쌍십절’ 보이콧이란 초강수를 꺼내든 것이다. 앞서 재한화교들을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 앞으로 량광중(梁光中) 주한 타이베이대표를 성토하는 서신도 보냈고, 지난 8월 18일에는 서울 명동 한성화교소학교에서 궐기대회도 가졌다. 오는 9월 6일에는 서울 광화문 주한 타이베이대표부 앞에서 대만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도 가질 예정이다. 손육서 한성화교협회장은 “쌍십절 행사 불참은 거의 확정적”이라며 “화교협회 자체 기념식에도 대표부 인사를 초청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수십억 세금 문제가 발단
사실 문제의 발단은 1992년 한국과 대만의 단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대만과 단교하면서 한국과 대만은 현재 공식적인 외교관계가 없다. 이에 해당 부지는 중화민국(대만)이 소유한 사실상의 ‘외교용지’지만, 정식 외교용지로 인정을 못 받고 있다. 다른 외교용지와 달리 해당 부지를 매각하거나 명의를 변경할 경우 수십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세금이 뒤따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세금 문제를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지금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명의상 소유주와 실소유주가 각각 중화민국(대만)과 한성화교협회로 다르다 보니 각종 문제도 빈발했다. 특히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서울시가 해당 부지를 공원용지로 지정할 당시 대표부 측은 별다른 이의제기조차 안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지가 공원용지로 묶이면 개발에 제한이 가해져 막대한 재산상 손실이 불가피하다.
심지어 2003년에는 해당 부지의 등기명의를 ‘중화민국’에서 ‘주한 타이베이대표부’로 일방 변경하는 통에 화교사회가 집단 반발하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재개발과 함께 현금청산을 한다고 해도 수백억원의 토지보상금이 일단 명의상 소유주인 대만 국고로 귀속되는 까닭에 재한화교들은 선조들이 일군 고유재산을 그대로 대만 정부에 빼앗기지 않을까 노심초사 중이다.
하지만 대만 정부는 재한화교들의 집단반발에도 불구하고 ‘지하층 분양’이란 방침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주한 타이베이대표부 역시 본국 외교부로부터 이 같은 훈령을 전달받아 화교협회 측에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대만 정부가 중국 측의 개입을 우려해 해당 부지를 떠나는 것을 주저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수표교 앞의 화교사옥은 재한화교들의 총본산인 옛 ‘한성중화회관’ 자리다. 당초 한성화교협회의 전신인 중화총상회가 있던 곳은 지금의 서울중앙우체국 뒤편이었으나, 일제 조선총독부가 경성우편국(서울중앙우체국의 전신) 확장을 위해 수용해가면서 대신 넘겨받은 땅이 현재 수표동 부지다. 당시 중화민국은 왕징웨이(汪精衛)가 이끌던 친일 괴뢰정부라서 총독부의 토지교환 요구에 흔쾌히 응하고 1941년에는 정식 등기까지 마쳤다.
수표교 일대는 임오군란 직후부터 ‘청국인 거류구역’으로 지정된 ‘차이나타운’으로 바로 길 건너편에는 중국 북방 출신 화교들의 모임인 ‘북방회관’도 있었다. ‘한국화교간사(簡史·약사)’를 쓴 양조림 전 주한 타이베이대표부 참사는 “수표동 땅은 한국전쟁으로 완파되기 전까지 중화회관이 있었던 자리”라며 “1970년대에도 개발계획이 있었는데 인근 수표교 고도제한 등의 문제로 결국 무산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연고가 있는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경우, 자칫 주한 중국대사관 측에서 이를 빌미로 화교 고유재산 처리에 관한 연고권을 주장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다. 이 같은 사태에 주한 중국대사관 측도 사태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간 주한 중국대사관은 ‘통일전선(통전)’ 전략에 따라 친대만계 재한화교 포섭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다만 지난 7월 싱하이밍(邢海明) 전 대사가 귀임한 후 대사가 공석인 관계로 아직까지 별다른 입장표명은 하지 않고 있다. 한성화교협회의 한 관계자는 “일부 재한화교들 사이에서는 주한 중국대사관이 나서줄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다”면서도 “다만 이 경우 화교 고유재산 처리문제가 더욱 복잡하게 꼬일 염려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주한 타이베이대표부 측은 “동등 가치 건물교환 방안은 한국 법률에서 명시된 민사거래 방식에 해당하지 않아 대규모 세금문제를 유발할 수 있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존재한다”며 “본 사안을 법에 따라 처리하며, 교민들의 재산을 보호하는 원칙을 준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