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인 얀 안드레 아발로(27)는 작년 12월 인스타그램에서 20대 한국인 여성을 만났다. 2022년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아발로는 우울증을 앓아왔다. 그런 그에게 여성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위로를 건넸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빚 때문에 채권자가 찾아와 못살겠다”는 여성의 말을 믿은 아발로는 수차례에 걸쳐 14만9000달러(약 2억원)를 송금했다. 하지만 이 여성은 사실 36세 한국인 남성이었다. 자신의 여자 친구와 짜고 아발로를 속인 ‘로맨스 스캠’ 범행을 벌인 것이다.
아발로는 이 사기꾼 커플을 잡으러 지난 2월 9000km 떨어진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로맨스 스캠 피해를 당해도 계좌 지급 정지 등 조치를 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사기 등 혐의로 고소를 해야 했다. 그는 한국인 변호사를 구해 서울 마포경찰서에 고소장을 넣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7단독 마성영 판사는 지난 22일 36세 남성 A씨에게는 사기 혐의로 징역 2년, A씨 범행을 도운 여자 친구 B(24)씨에게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아발로 사례처럼, 최근 SNS 등을 이용해 이성에게 접근해 호감을 산 뒤 돈을 뜯어내는 신종 사기 ‘로맨스 스캠’이 급증하고 있다. 26일 경찰청이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여섯 달간 접수된 로맨스 스캠 피해액은 총 506억원(791건)에 이른다.
특히 국내에선 로맨스 스캠 피해를 보더라도 피해자가 사기꾼의 계좌를 동결하는 ‘계좌 지급 정지 제도’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아발로 같은 피해가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통신 사기 피해 환급법에 따르면, 보이스 피싱 피해자가 금융회사에 계좌 입출금 금지를 요청하면, 금융사는 즉각 지급을 정지해야 한다. 하지만 로맨스 스캠은 이런 지급 정지 제도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로맨스 스캠은 피해자가 아니라 경찰이 요청할 때만 은행이 지급 정지를 해준다. 경찰청에 따르면, 로맨스 스캠에 연루된 계좌 5471개 가운데 최소 2회 반복 사용된 계좌는 1706개(31.2%)로 조사됐다.
로맨스 스캠뿐 아니라 대표적인 신종 사기인 ‘투자 리딩방 사기’ 또한 계좌 지급 정지 제도 적용 대상에서 빠져있다. 투자 리딩방 사기는 지난 2월부터 7월까지 여섯 달간 총 3665억원 피해(4360건)가 접수되는 등 급증하고 있다. 투자 리딩방 사기에 동원된 계좌는 총 3만7149개로, 이 중 2회 이상 반복 사용된 계좌가 6730개(18%)다. 경찰청은 “로맨스 스캠, 투자 리딩방 사기 사건에 반복 이용된 계좌가 총 8436개”라며 “계좌 1개가 평균 5.05개 사건에 사용된 것으로 분석된다”고 밝혔다.
최근 경찰은 해외 범죄 조직이 투자 리딩방·로맨스 스캠·보이스 피싱 등 여러 시나리오를 병행하며 범죄를 저지르는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수익만 되면 각 범행 노하우를 가진 조직원들이 수시로 이합집산을 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신종 범죄에 발맞춰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미 지난 2020년 로맨스 스캠 피해가 발생할 경우 계좌 지급 정지 등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는 ‘다중 사기 범죄 방지법’이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조은희 의원은 “범죄자들이 사각 지대에서 국민들을 기만하며 범행계좌·번호를 반복 사용하고 있다”며 “신종 사기 계좌를 조기 차단해 국민들을 추가 범죄 피해에서 신속히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