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0일 ‘의대 진학’을 간판으로 내건 대치동의 한 수학학원. 평일 오후 3시가 약간 넘은 시간에 의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초2, 초4 학생이 각각 중3 수학과 고등학교 수학2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 학원의 A원장은 “부모님이 의사라서 아이들도 의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대치동에서 의대 보내려는 집단은 워낙 탄탄해서 어렸을 때부터 차근차근 준비한다”고 말했다.
특히 작년에 3~4명이었던 초등학생 수강생이 올해 20명으로 대폭 늘었다고 전했다. A원장은 “원래 고등 전문 학원이었지만 작년부터 초등 고학년이 오기 시작했다”며 “작년에는 초등 1~3학년이 한 명도 없었는데 올해는 저학년만 10명”이라고 전했다. 초등학생들은 일주일에 2~3번 학원을 찾아 2~3시간씩 선행학습을 한다.
학원가에 생겨난 ‘초등 의대반’
목동의 한 수학학원은 지난 3월 초등 의대반을 신설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중학교 3학년 2학기 과정을 듣는 수업이다. 학원 관계자는 “학부모가 수업을 요청하셔서 개설된 것”이라며 “목동에선 초6이 수1을 배우는 학원도 많다. 저희 의대반은 그렇게 진도가 빠른 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의대 증원 때문에 의대반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지난 2월 정부의 의대 증원 발표 시기와 학부모의 요청 시기가 맞물린다.
지난 5월 21일 차의과대가 모집인원을 40명 늘리겠다고 결정하면서 내년도 의대 선발규모는 전년 대비 1509명 늘어난 4567명으로 사실상 확정됐다. 입시 전문가들은 기말고사가 끝난 후인 6월 말부터 의대 입시 상담이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봤지만, 이미 지난 5월 16일 의대 증원 취소소송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각하된 이후로 학원가에서 의대 입시 문의가 많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대치동에선 의대 ‘지역인재전형’를 겨냥해 ‘지방 유학’을 가야 하는지 묻는 초등학생 학부모의 상담이 늘었다.
대치동 IDA입시연구소 최주영 소장은 “의대 증원 이슈가 나온 이후로 의대 입시 관련 문의가 늘었다”며 “고등학생 학부모는 의대 진학을 위한 생활기록부 주제 선정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하고, 중학생 학부모는 의대를 가려면 특목고·자사고·일반고 중 어떤 학교가 유리한지, 초등학생 학부모는 의대 입시에서 ‘지역인재전형’을 준비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할지 등을 많이 문의한다”고 전했다.
“의대 입시 관련 문의 30% 늘었다”
교육부는 지난 5월 20일 의대 증원이 반영된 각 대학의 ‘2025학년도 대입 전형 시행 계획 변경 사항’을 오는 30일 확정·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시행 계획에는 수시·정시 비율,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율 등이 포함된다. 교육부 관계자는 “오는 31일 이후에는 천재지변 등 불가피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대입전형 시행계획 변경이 곤란하다”며 “증원이 확정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투스에듀 관계자는 “지난 5월 16일 서울고등법원의 가처분 신청 기각 발표 이후로 강남하이퍼학원의 의대 입시 관련 문의가 30% 더 늘었다”며 “수능 성적표를 들고 와 의대 준비 가능 여부 등을 문의하고 의대반 등록 절차를 묻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투스 계열 입시 학원들은 의대 정원이 확대됨에 따라 반수반 수업 문의가 늘어난 것을 고려해 지난 4월 ‘조기 반수반’을 열었다. 보통 반수반은 대학의 1학기 시험이 끝나는 6월에 개강하는데 개강 날짜를 한 달 정도 앞당긴 것이다.
2025학년도 서울대 이공계 정원(1775명)은 이번 의대 증원 규모(1509명)와 비슷하며, 의대 정원(4567명)도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 이공계 정원 총합(4882명)과 맞먹는다. SKY 최상위권 이공계를 비롯해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 성적인 수험생들이 의대로 빠지면 빈자리는 이른바 ‘서성한(서강대·성균관대·한양대)’급 이공계가 채우게 된다. 의대 증원이 상위권 이공계 학과의 합격선 하락에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남윤곤 메가스터디교육 입시전략연구소장은 “위쪽에서 1500명이 늘어났지만 그 파급력은 도미노처럼 아래로 내려갈수록 커질 것”이라며 “서울 지역 의대를 제외하고 모든 학교의 합격선이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재수생 자녀를 둔 손모(50)씨는 주간조선에 “상위권 학생들이 지방 의대로 분산된다면 아이가 목표하는 대학의 경쟁률이 낮아지지 않겠느냐”며 “의대를 지망하지 않는 학생들도 좀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작년에 건국대에 원서를 넣었다는 재수생 손모(20)씨는 “올해 의대 증원 효과를 고려해 중앙대 지원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의대·이공계 합격선 중 하나는 떨어진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학생들이 의대로 쏠리게 되면 의대 합격선은 유지될 수 있지만 상위권 이공계 합격선이 낮아질 것이고, 의대 쏠림 현상이 덜하다면 모집 정원은 늘어났기 때문에 의대 합격선이 떨어질 수 있다”며 “의대 합격선이 떨어지거나 상위권 이공계 합격선이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는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일 종로학원은 수능 국어·수학·탐구 백분위 점수 300점을 기준으로 할 때 의대 정원이 1500명 늘면 의대 합격선이 2.91점가량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 수능에서 의대에 합격하려면 285.9점을 얻어야 했지만 1500명을 더 뽑는다고 가정할 경우 282.99점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또한 기존에 SKY 이공계 합격생의 45.4%가 의대 합격권이었으나 의대 정원이 늘면서 2025학년에는 67.7%까지 합격권에 들 것으로 추정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의대 합격선이 떨어지더라도 극상위권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극상위권이 몰리는 서울 지역 의대는 증원이 없으며 경기·인천 지역은 341명, 비수도권은 1168명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남윤곤 소장은 “‘빅5’ 의대로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가톨릭대·울산대·성균관대 의대 중 울산대, 성균관대 의대 정원이 대폭 늘어났다”며 “정원이 유지되는 서울대, 연세대, 가톨릭대 의대는 점수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의 A원장은 대치동에는 의대 증원으로 일희일비하는 학부모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동네는 원래 내신 성적이 아닌 수능 성적으로 의대를 간다. 내신에서 수학 문제 하나 틀리면 1등급에서 4등급을 오가기 때문이다. 서울 단대부고만 해도 내신은 5등급인데 수능 수학 100점 맞는 학생이 많다. 지방 의대 붙은 학생이 수도권 의대 가려고 주말마다 서울 와서 의대 논술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선 다들 수도권에서 개인 병원 차리고 싶어 하지 지방에서 일하려는 의사는 많지 않다.”
대치동에서 의대관을 운영하는 B원장은 “극상위권은 인서울 의대 가고 싶어 하는데 늘어난 의대 정원은 지방 의대에 집중돼 있다”며 “극상위권 학생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B원장은 “그런데 (극상위권이 아닌 학생들은) 작년부터 재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조가 이어지는 것 같다. 요즘은 학생들이 학부모에게 ‘2026년에 의대 가볼게’라고 한다더라”고 전하며 “학원가 얘기 들어보면 가천대 의대 다니다가 인서울 의대 가려고 재수종합반 들어온 애들도 꽤 있다고 한다. 의대 증원이 희망고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극상위권이 아니거나 당장 대입을 앞두지 않은 학생에게 의대 증원은 기회로 여겨진다. 이에 지역인재전형을 겨냥한 ‘지방 유학’이 늘어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정부는 지역 의료 강화를 위해 비수도권 의대 모집 인원 중 60% 이상을 지역인재로 뽑도록 권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역인재전형은 의대가 있는 지역 출신 수험생만 지원할 수 있는 입시 전형이다. 현재 ‘지방대학 및 지역균형인재 육성에 관한 법률(지방대육성법)’ 시행령에 따르면 비수도권 의대의 지역인재 선발 비율 하한선은 40%(강원·제주는 20% 이상)이다.
비수도권 의대, 지역인재 선발 두 배 늘려
종로학원이 고2부터 적용될 2026학년도 대학입학전형 시행계획을 분석한 결과, 지역인재전형을 운영하는 비수도권 의대 26곳은 당초(1071명) 인원보다 두 배 이상을 늘린 2247명(63.4%)을 지역인재로만 선발할 계획이다. 대학들이 이런 추세를 2025학년도 입시에도 똑같이 적용한다고 가정하면 지역인재 선발 규모는 1966명(63.2%) 수준으로 예상된다. 대학들이 발표한 대입전형 시행계획은 수험생의 안정적인 입시 설계를 위해 입학연도 1년 10개월 전까지 공표하도록 정한 고등교육법에 따른 것이다.
지역인재전형은 수도권 학생들이 지원할 수 없어 상대적으로 경쟁률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2024학년도 입시에서 27개 비수도권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경쟁률은 10.5대 1로, 전국 단위 선발 전형 경쟁률(29.5대 1)의 3분의1 수준이었다. 반면 서울권(9개) 의대의 경우 수시 평균 경쟁률은 47.5대 1, 경인권(3개) 의대는 무려 132.8대 1을 기록했다.
경쟁률이 낮은 만큼 합격선도 낮다. 앞서 종로학원이 지방권 27개 의대의 2023학년도 수시모집 최종 합격생의 ‘백분위 70% 컷’을 분석한 결과 지방권 의대의 지역인재전형 최저 합격선은 학생부교과전형 기준 1.51등급으로 서울권(1.18등급)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70% 컷은 상위 70%에 해당하는 합격자의 점수를 말한다.
의대 겨냥 ‘지방 유학’ 6년 전 가야
변수는 지역인재전형의 지원 조건 변화다. 2027학년도까지는 해당 지방대학이 소재한 지역의 고교를 졸업(졸업예정자 포함)하면 지역인재전형으로 지원할 수 있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 소재한 중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된다. 지방 중·고교를 6년간 다녀야만 지역인재전형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의대 진학을 위한 지방 유학을 고민한다면 초등학생 때 결정해야 한다.
최주영 소장은 “지역인재 요건이 6년으로 늘면서 일찍부터 지방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며 “특히 모집 정원이 1.9배로 크게 늘어난 충청권과 고3 학생 수 대비 모집정원 비율이 가장 높은 강원권의 인기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권역별 고3 수와 비교할 때 의대 진학에 가장 유리한 곳은 강원권으로, 학생 수 대비 의대 모집정원이 2.9%에 이른다. ‘이과 지망생’으로 좁히면 5%까지 확대된다. 20명 중 1명이 의대 합격권이라는 의미다. 그는 “지방 의대는 대부분 수능 최저학력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수능 최저를 충족한다면 내신 2등급대 학생도 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학원가에 따르면 ‘동맹휴학’ 중인 의대생 중 지방 의대 저학년생 일부가 최근 서울 학원의 반수반에 등록해 입시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성호 대표는 “보통 반수생이 8만명 정도로 잡히는데 지난 수능에서 반수생이 9만명 정도였다”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의대 증원으로 상위권 반수·재수생이 대거 유입되면서 변별을 위해 수능 난도가 올라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수험생들은 ‘킬러문항’ 출제가 배제된 작년 수능이 ‘불수능’ 평가를 받은 데 이어 올해도 그 기조가 이어질까 걱정하고 있다.
실제 경기도교육청 주관으로 실시된 5월 모의고사에서 수학 1등급 컷은 70점대였다. ‘확률과통계’ 77점, ‘미적분’ 71점, ‘기하’ 73점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이번 모의고사가 지난 3월 모의고사에 비해 어려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최 소장은 “정시 경쟁률이 높아질 경향이 커 변별을 위해 수능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며 “킬러문항을 없애면서도 변별에 성공한 작년 국어 사례를 비춰볼 때 불수능 기조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2028학년도 대입부터는 문·이과 구분이 없어지며 수능에서 ‘심화 수학’에 해당하는 ‘미적분II’와 ‘기하’ 선택과목이 사라진다. 사실상 문과생 수준의 공통 과목 시험만 보는 것이다. B원장은 “2028학년도부터 교육과정이 개편되면서 문과 수학으로만 대학을 가게 됐다”며 “수학이 쉬워지면 변별력이 없어지기 때문에 의대 논술, 수리 논술 전형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수능이 어려워지지 않으면 논술 사교육이 증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의대로 이공계 인재들이 유출되면 기초과학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신용태 숭실대학교 IT대학 컴퓨터학부 교수는 “디지털 기술과 AI 등이 발전하는 시점에서 이공계에 우수한 인재가 필요한데 갑작스럽게 의대 정원을 많이 늘리면 생태계가 깨질 수 있다”며 “이공계 학생들이 의대 진학을 위해 반수를 하는 등 이탈하면 이공계가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의대 진학 위한 이공계 엑소더스 커질 것
지난 2월 종로학원의 분석에 따르면 졸업과 동시에 삼성전자 취업이 보장되는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의 미등록률은 정시모집 인원(25명) 대비 220%(55명)이었다. 최초 합격자가 등록을 포기한 뒤 그다음 순서로 입학한 1차 추가 합격자도 모두 빠져나간 것이다. 현대자동차 계약학과인 고려대 스마트모빌리티학과의 미등록률은 105%로 20명 모집에 21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종로학원은 미등록 인원이 의대 또는 서울대로 연쇄 이동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같은 이공계 엑소더스는 의대가 증원되면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임성호 대표는 “1500명이 한꺼번에 증가하는 것은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역대급 변화”라며 “SKY 이공계에서 의대로 빠져나가면 그 빈자리는 서성한급 학생들이 채울 수밖에 없고 여기는 다시 또 다른 대학에 갈 학생들이 채우는 연쇄 이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SKY 이공계에 합격하고도 반수를 통해 의대로 이동하는 경우도 늘어날 것”이라며 “변화의 폭이 매우 커지고 (이공계 이탈 등의 영향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