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193(양재동) 서울가정법원·서울행정법원 청사./조선일보 DB

서울 서초동의 한 법무법인에서 일하는 이혼 전문 변호사 A씨는 최근 의뢰인들에게 “이혼 소송을 좀 더 오래 끌어줄 수 없느냐”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이 중 적잖은 사람은 “집값이 너무 떨어졌다”는 이유를 댄다. 집을 매각해 재산 분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집값 하락기에 이혼하려니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이혼 소송을 1년 넘게 끄는 경우가 많아 이를 부담스러워했는데 이젠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이혼 사건을 주로 맡는 서초동의 한 로펌도 최근 의뢰가 예년보다 30% 가까이 줄었다고 전했다. 로펌 관계자는 “애초에 이혼하겠다 마음먹은 사람들도 불황 속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니 망설이는 경우가 늘었다”고 말했다.

23일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전국의 전체 이혼 건수는 9만3244건으로, 1997년 이후 25년 만에 처음으로 10만건 아래로 떨어졌다. 이혼 건수는 IMF 외환 위기 때인 1998년 처음 10만건대에 진입한 이후 줄곧 연 10만~13만건 안팎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진 2020년 감소세가 시작되더니, 지난해 전년 대비 8.2% 이혼이 줄어드는 등 감소 폭이 특히 컸다.

법조계에서는 2021년 말~2022년 초 시작된 세계적 불황이 원인이란 반응이 많다. 작년 상반기의 경우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시작으로, 3~4월에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리를 잇따라 끌어올리는 등 세계적인 고금리·고물가가 본격화한 때다. 이 시기(1~6월) 이혼 건수는 전년 동기 대비 11.5%나 줄었다.

/일러스트=박상훈

다수의 변호사는 이혼할 때 남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재산 분할인데, 불황으로 부동산·주식 등 자산 가치는 떨어진 반면 금리와 물가는 올라 독립 가구로 살 때 드는 생활비는 늘어났기 때문에 이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늘었다고 분석한다.

법률사무소 현강의 이승우 변호사는 “아파트 가격이 계속 떨어지자 지금 이혼해야 하는지, 집값이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상담하는 의뢰인이 많다”며 “이혼 과정은 길면 2년 가까이 이어지는데, 강남 아파트의 경우 이 기간 몇 억원씩 떨어지거나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법무법인 승원 김현기 변호사 역시 “공동 명의로 된 아파트를 본인이 받으려고 해도 금리가 너무 높아 대출받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도 많다”고 했다. 예를 들어 10억원짜리 집을 공동명의로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집을 매입할 때 남편이 본인 이름으로 4억 대출을 받은 경우, 이혼할 때 아내가 집을 가져가려면 남편 이름으로 된 담보대출을 본인 명의로 바꿔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 대출 심사를 받을 때 담보물은 같아도 금리가 과거에 비해 높아진 상황이면 아내 입장에선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혼 소송 기간이 계속 길어지는 경향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혼하려는 당사자들이 재산 분할 과정에서 아파트 가격 감정 신청을 잇따라 하는 게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한 이혼 전문 변호사는 “집값 폭등 시기에는 은행 시세표만 봐도 역대 최고가가 나오는 일이 많아 아파트 가격 감정을 할 필요도 없고 재산 분할도 수월했는데, 최근에는 ‘나는 떨어진 가격이 아닌 원래 가격으로 (분할을) 받겠다’고 다투면서 아파트 가격 감정 신청을 더 많이 하는 추세”라고 했다.

이혼 과정에서 생활비와 연동되는 양육비 합의도 어려워지고 있다. 법원은 아이를 키우는 상대방에게 줘야 할 양육비를 정할 때, 돈을 주는 사람의 소득과 현재 물가를 반영해 지급해야 할 양육비 기준을 제시한다. 하지만 물가가 오르면서 법원이 제안하는 양육비 기준도 점차 높아지고 있고, 합의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에스 임태호 변호사는 “부부 사이가 멀어져 별거하거나, 교류하지 않더라도 불황 속에서 아이 양육을 해야 하다 보니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이혼 건수가 줄어드는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고 했다.

한편 이혼 건수가 줄어드는 것에는 경제적 요인뿐만 아니라, 결혼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승윤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인 가구나 동거 가구가 늘어나고 결혼은 감소하는 등 가구 형태가 변화한 만큼, 그게 이혼이 줄어드는 것에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