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서 민간조사기업을 운영하며 소위 ‘탐정’으로 일하고 있는 최환욱 대표는 최근 ‘탐정을 잡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불륜 사건 조사를 부탁했더니 갑자기 ‘의뢰 사실을 상대에게 알리겠다’며 돈을 요구하거나, 아예 사건 수임비만 받고 잠적해버리는 등 피해를 입은 이들이었다. 최 대표는 “아무나 탐정 이름을 달고 일할 수 있게 되면서 업계가 혼탁해져 사기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탐정’이란 이름으로 영리(營利) 활동을 하는 것이 허용된 것은 작년 8월. 누구도 탐정이란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던 신용정보법이 개정된 덕분이다. 이후 ‘탐정’ 간판을 내건 곳은 우후죽순처럼 늘고 있는데, 탐정의 업무 범위와 이들에 대한 관리·감독 부처를 규정하는 탐정법(탐정업 관리에 관한 법률) 등 후속 입법은 1년째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 규제가 없다 보니, 심지어 범죄자라고 해도 세무서에 사업자 등록만 하면 ‘탐정 간판’을 걸 수 있는 사실상 ‘무법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유우종 한국민간조사중앙회 회장은 “불법 촬영 피해자가 유포된 영상을 지워달라고 소위 ‘탐정' 사무소에 찾아가자, 오히려 이를 빌미로 여성을 협박해 성폭행하는 경우 있었다”면서 “탐정을 빙자한 범죄자가 판을 치고 있다”고 했다. 유 회장은 “탐정업 양성화를 위한 신용정보법 개정이 오히려 ‘사기꾼 전성시대’를 열었다”고 했다.
업계엔 각종 ‘탐정 자격증’만 판치고 있다. 김용판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탐정 관련 민간 자격증은 총 73개다. 작년 10월엔 31개뿐이었는데, 7개월 새 2배 이상이 된 것이다. 탐정 자격증을 발급해준다는 업체도 같은 기간 22곳에서 46곳으로 늘었다. 이 자격증들은 모두 사업자등록증 등 기초 서류만 갖추면 만들 수 있는 ‘등록 민간자격’이다. 현재 국가공인 탐정 민간 자격증은 없는 상태다.
본지가 한 자격증 업체에 연락하자, “꼭 탐정 자격증이 있어야 사무소를 열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격증을 걸어두면 고객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며 자격증 취득을 권유했다. 창립 1년도 되지 않은 이 단체는 “16시간 교육을 받고 객관식 시험을 통과하면 되는데 대부분 합격한다”며 “탐정법이 통과되고 국가고시가 생기면 시험이 어려워질 수 있으니 지금 같은 때 자격증을 따 둬야 한다”고 했다. 이 업체는 수강료 명목으로 95만원을 요구했다. 다른 협회는 ’12시간 교육에 자격증 발급, 합격률 90% 보장’을 조건으로 95만원을 달라고 했다. 대한민간조사협회 하금석 회장은 “현재는 하루 이틀 교육받고 자격증을 따서 탐정사무소를 열기도 하는데, 이들이 탐정업의 신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사전 규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탐정 업계 내부에서도 “탐정업이 허용된 이후, 실제 탐정은 안 늘고 ‘사짜’만 늘었다”는 말이 나온다. 불법적인 일까지 도맡아 하는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들이 앞다퉈 탐정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피해를 보는 고객도 늘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현재 ‘탐정’ ‘민간 조사' 등의 이름을 내건 곳이 3000개쯤 되는 것으로 추산한다. 한 탐정업체 관계자는 “마약을 구해달라거나, 사람을 때려 달라는 의뢰도 종종 들어온다”며 “누군가는 돈만 보고 이런 일도 수임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탐정은 민간 조사라는 업무 특성상 합법과 불법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는데, 몇 시간짜리 교육만 받고 자격증 받은 이들이 탐정이라고 나서면서 불법 행위를 조장하고 있다”면서 “탐정의 업무 범위와 이들에 대한 규제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