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겸(65)씨는 올해 초부터 탑골공원을 찾기 시작했다. 공원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작년 2월부터 무기한 폐쇄된 상태다. 서울 도봉구에서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는 김씨는 “공원 정문에는 폐쇄 안내문이 붙어있었지만 주변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바글바글했다”며 “공원 근처에서 장기도 두고, 3000원짜리 해장국을 사 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폐쇄된 탑골공원에 갈 곳 없는 노인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는 노인들이 그나마 교류할 수 있었던 경로당, 노인복지관 같은 시설의 문을 걸어 잠갔다. 서울시는 노인들의 백신 접종율이 높아지면서 조금씩 제한을 풀고 있다. 하지만 17일 기준 서울 시내 경로당 3468곳 중 다시 문을 연 것은 1833곳 뿐이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노인들은 ‘이곳 외에는 시간을 보낼 곳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경기도 광명시에 사는 윤경한(77)씨는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도 공원이 있지만 젊은 친구들이 많아, 앉아있기가 민망하다”며 “1주일에 5일 정도는 탑골공원 근처로 와 말벗을 찾는다”고 했다. 오의영(75)씨는 “일을 하고 싶어도 나이가 많아 불러주는 곳도 없고, 코로나 때문에 전부 문을 닫아 갈 곳도 없다”고 했다.
이들은 탑골공원 주변을 서성이며 과거를 회상한다. 50년 전 전북에서 상경했다는 김재협(88)씨는 “당시 서울에는 갈만한 공원이 없어서 다들 탑골공원에 모여 놀았다”고 했다. 서울 은평구에 거주하는 박모(60)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종로구에 살았다고 한다. 박씨는 “지금은 돌아가신, 내 아버지랑 탑골공원을 거닐던 기억 때문에 이곳을 종종 찾는다”고 했다. 젊었을 때, 탑골공원 인근의 철도 사무소에서 일했다는 임상훈(83)씨는 “내게 종로는 계속 찾게 되는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노인들에게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는 특별한 공간이다. 경북 안동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따라 서울로 올라왔다는 김재현(66)씨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강남이나 홍대가 있는 것처럼, 우리 세대들에겐 종로가 가장 좋은 곳이었다”며 “종로를 걸으면서 나이가 들어버린 스스로의 인생을 곱씹게 된다”고 말했다.
공원 문은 닫혔어도, 탑골공원 인근은 여전히 노인에게 따뜻한 장소다. 김재겸씨는 “아내한테 밥 얻어먹는 것도 한두번이지, 돈 못 갖다주고 눈치보여서 여기 오기 시작했다”며 “여긴 해장국 3000원에 소주 3000원, 저녁까지 6000원이면 버틸 수 있다”고 했다. 종로 ‘콜라텍’이 삶의 낙이었다는 배경순(73)씨는 “1000~2000원이면 국일관에서 5시간을 춤 출 수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은게 너무 아쉽다”고 했다. 탑골공원 인근의 자택 앞에서 커피자판기 3대를 운영하는 고한순(66)씨는 하루에 30~40잔 정도의 커피를 어르신들께 무료로 뽑아준다. 고씨는 “200원짜리 커피 한잔으로 어르신들이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탑골공원을 찾는 노인들은 서로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박손서(73)씨는 매일 점심 시간 이후, 낙원상가 근처 창고에서 의자와 탁자를 가지고 나와 공원 담벼락에 ‘장기판'을 차린다. 박씨는 “갈 곳 없는, 같은 처지의 노인들이 이 곳에 모여 장기라도 둘 수 있게 무료 봉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민트색 운동화에 파란색 등산복 차림의 박원식(79)씨는 그 옆에서 빨간색 카세트로 음악을 틀고 있었다. 자신을 ‘음악 감정사'라고 소개한 박씨는 “오류동에서 카세트 들고 지하철 타고 40분을 왔다”며 “다른 친구들이 음악을 듣고 기분 좋아지라는 마음에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고 했다. 옆에 앉아 음악을 듣던 노인 2명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음악 잘 들었다'고 인사를 건넸다.
노인들은 탑골공원이 ‘변하지 않는 공간'이라 좋다고 말한다. 노인들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탑골공원만은 변함 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건설 현장에서 20년 넘게 일했다는 안모(73)씨는 일이 없는 날엔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안씨는 “나이가 들어가는 30년새 서울 곳곳에 새 건물도 들어서고 세상이 빠르게 변했는데 이곳만은 그대로”라며 “공원 안에 있는 문화재(원각사지십층석탑) 때문에라도 이 공원을 못 없앤다니 다행”이라고 했다. 공원 근처에서 ‘나주국밥'을 운영하는 이창미(57)씨는 “이 곳은 어르신들에게는 고향같은 곳”이라며 “나도 나이들면 이 곳에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