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9일 오전 7시 50분쯤. 서울 강남구에 있는 봉은초등학교 정문 앞에 학부모 9명이 속속 모였다. 자녀 등굣길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손에는 ‘어린이가 제일 소중합니다’ ‘아이들 건강 지켜라’ 같은 문구가 적힌 손팻말이 들려 있었다. 이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학교 정문에서 30m 가까이 떨어진 도로 건너편 재건축 공사 현장.
이 시각 흙·철근 같은 부산물을 실은 25톤(t) 공사 트럭이 도로를 꾸준히 오가고 있었다. 학부모가 공사장 정문 앞에 서자 정문은 닫혔지만, 후문에서는 여전히 트럭이 연이어 나왔다. 오전 8시 40분쯤, 초등학생 1명이 1m 남짓인 비좁은 인도 폭을 따라 등교를 하고 있었다. 트럭은 그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학부모 이모(45)씨는 “지금까지 시위를 해 본 적도 없었고, 나도 내가 이 곳에 나올 줄 몰랐다”며 “트럭이 쌩쌩 달리면서, 각종 분진 날리는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강남 한복판인 삼성동 봉은초등학교 앞에서는 지난 5일부터 이렇게 매일 ‘초등학생 부모’들의 침묵 시위가 열리고 있다. 등하굣길 공사 트럭 운행 중단과, 공사장 ‘비산(飛散) 먼지’에 대한 대책을 세워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다. 학부모 천모(46)씨는 “아이들 통행에 위험하니 등하굣길 트럭 운행을 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시위에 나서기 전까지 지켜지지 않았다”며 “우리가 없으면 또 정문을 열고 공사를 할까봐 매일 나온다”고 했다.
학생 수 580여 명의 이 학교는 사면(四面) 중 두 면인 정문과 후문에 각각 다른 재건축 현장 2곳이 있다. 작년 9월부터 철거 작업 중인 ‘청담동 재건축’(청담삼익) 공사 현장과, 작년 1월 공사를 시작해 현재 국토부에서 철거 심의를 받고 있는 ‘삼성동 재건축’(홍실아파트) 현장이다. 정·후문을 제외한 측면은 한강 배수지로 막혀 있기 때문에 통행이 불가능하다. 학교를 가기 위해선 이 곳을 지날 수밖에 없다. 학교가 ‘외딴 섬’처럼 뚝 떨어져 있는 셈이다.
◇코로나로 수시 환기 필요한데…교실로 비산 먼지 ‘폴폴’
학부모들은 분진과 미세먼지 피해를 호소한다. 코로나 방역 지침 상 학교에서는 수업 중에도 수시로 창문을 열고 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공사 현장에서 떠밀려오는 비산 먼지 때문에, 초등생 자녀들이 안과 질환 등을 호소한다는 것이다.
학부모 황모(42)씨는 “3학년인 자녀가 최근 비염이 심해져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학부모도 “이번 학기에만 아이가 안과에 간 게 수차례”라고 했다. 학교 측에 따르면, 보건소를 찾아와 ‘인공눈물’을 넣는 학생도 부쩍 늘었다. 학부모들은 “창문을 닫을 때 만이라도 공기 정화가 될 수 있도록, 공기청정기와 이중창이라도 설치해 달라”고 인근 조합에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철거 작업을 진행 중인 홍실 조합 측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다고 한다.
◇학부모가 돈 모아 설치하면? 교육청 요령 위반
학부모가 자체적으로 돈을 모아 공기청정기와 이중창을 설치하려고도 해봤지만, 교육청 지침이 발목을 잡았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고 있는 학부모 A씨(39)는 “시도를 해 봤지만, 교육청으로부터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특정 금액을 목표로 하거나, 모금 희망액을 조사하는 등 모금 할당으로 흐를 수 있는 기금 조성 행위는 금지된다”며 “따라서 학교운영회나 학부모회에서 돈을 모아 공청기와 이중창을 제공할 수 없다”고 했다. ‘서울시 학교발전기금의 조성운용 및 회계관리 요령’에 따르면, 학교교육시설의 보수 및 확충 등을 위해 학부모 간 일정 금액을 ‘갹출(醵出)’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학부모, “조합 측 수차례 ‘몰래 공사’…신뢰할 수 없다”
재건축 조합에 대한 학부모 불신은 깊어지고 있다. ‘삼성동 재건축’ 현장은 철거 허가를 받기 위해 공사를 일시 중지한 상황에서, 수차례 ‘몰래 공사’를 하다 걸렸다는 게 학교와 학부모 측 설명이다. 지난 22일 오전 9시쯤 학부모 B(43)씨는 ‘공사 중지’ 상태여야 할 삼성동 재건축 조합이 포크레인을 이용해 땅을 파다가, 인도에 설치된 공사용 철제 펜스 합판 밑으로 기다란 나무판이 빠르게 튕겨져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시각 한 초등학생이 등교를 하고 있었고, 합판은 수 초 간격을 두고 아슬아슬하게 아이의 발목을 스쳐 지나갔다. B씨는 “‘현재 공사를 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등교 중인 아이들도 있으니 멈춰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합 측이 ‘공사가 아닌 청소’라고 하다가 ‘방음벽 펜스’를 치고 있다고 말을 바꿨다”고 했다.
건설업계에 따르면, ‘방음벽 펜스’는 철거 첫 단계에서 설치하는 것으로 철거 과정에 포함돼 있다.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을 할 수 없다. 건설부동산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이현성 법무법인 자연수 변호사는 “철거 관련 심의를 받는 상황에서는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는 등 공사로 볼 수 있는 작업을 진행해선 안 된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학부모들은 ‘당장 손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오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학부모 B씨는 “수차례 구청와 교육청을 찾았지만, 서로 책임이 없다는 원론적인 답만 반복했다”고 했다. 지난 9일부터는 학교 학부모와 학생, 인근 주민 1300여 명을 대상으로 비산 먼지 대책을 세워달라는 내용의 서명을 받았고, 강남구청장에게 전달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강남구청 재건축협력팀 관계자는 “재건축 공사를 하면서 주변에 일부 피해는 불가피하다”며 “교육환경영향 평가 등의 내용을 준수하도록 중재하는 건 교육청 소관이지 구청이 나설 부분이 아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