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의혹 사건을 조사한 국가인권위원회가 25일 “박 전 시장이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言動)은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직권조사 결과를 내놨다. 이 결론은 입법·사법·행정 3부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국가기구인 인권위가 박 전 시장의 성희롱 의혹에 대해 내놓은 공식 판단이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과 상임위원들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날 인권위는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 보고를 의결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인권위는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유력 정치인과 하위직급 공무원 사이의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한 성희롱”이라고 이번 사건을 규정했다.

인권위는 “박 시장이 늦은 밤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을 보내고 집무실에서 네일아트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며 “이와 같은 박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 자료와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일관성, 51명에 달하는 참고인 조사를 바탕으로 이같이 판단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또 피해자인 여비서가 “시장의 일정 관리 및 하루 일과의 모든 것을 살피고 보좌하는 업무 외에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을 대리처방 받거나 복용하도록 챙기기, 혈압 재기, 명절 장보기 등 사적 영역에 대한 노무까지 수행했다”며 “이런 비서 업무의 특성은 공적 관계가 아닌 사적 관계의 친밀함으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서실 직원들이 박 시장과 피해자를 ‘각별한 사이’나 ‘친밀한 관계’로 인지해 이를 문제로 바라보지 못했고, 피해자 또한 이런 노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이것이 비서 업무로 정당화돼 문제의 본질이 왜곡되었다”고 했다. 일각에서 피해자가 박 전 시장의 생일에 보낸 편지를 공개하는 등 성희롱 사건의 본질을 훼손하려는 시도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 인권위는 또 “서울시가 시장 비서실 데스크 비서에 20~30대 신입 여성 직원을 배치해 온 것은 비서 직무가 젊은 여성에 적합하다는 성 역할 고정관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여성·시민단체가 연대한‘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이 25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제대로 된 직권 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지난해 7월 인권위에 해당 의혹에 대한 직권 조사를 촉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인권위는 이날 전원위원회에서 박 전 시장 의혹을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했다. /박상훈 기자

인권위는 특히 “박 시장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서울대 교수 조교 성희롱 사건 등 여성 인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의 공동변호인단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젠더(gender·성) 정책을 실천하려 했기에 그의 피소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인권위는 서울시 직원들의 성희롱 묵인·방조 의혹에 대해선 “객관적 증거를 확인하기 어렵다”면서도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인권위는 “지자체장들이 성희롱 가해자일 경우 감독할 상급기관이 없어 당사자의 사퇴 및 형사처벌 외에는 이를 제재할 관련 규정이 없다”며 “지자체장이 시도지사협의회를 통해 성희롱·성폭력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과 공동선언을 천명하는 등 자율규제를 실시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이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지자체장의 잇단 성희롱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