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유전자를 받아서 태어난 우리도 엄마 아빠 말을 안 듣는데, 개가 내 말을 듣겠어요.”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동물행동치료센터에서 만난 설채현(35) 수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설 수의사는 한국 1호 수의사 겸 트레이너다. 국내 수의사 최초로 미국의 반려견 트레이너 전문 양성 기관인 KPA의 클리커 트레이너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반려견의 문제행동을 해결하는 EBS 프로그램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에 출연하며 유명해졌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반려동물을 기르는 가구는 591만 가구로 전국 가구의 26%다. 개를 기르는 사람이 많아진 만큼, 개의 문제행동을 치료하고 싶다며 설 수의사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개는 개입니다. 개가 인간보다 뒤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개의 언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죠.” 설 수의사는 “개를 집에 혼자 두고 갔더니 곳곳에 오줌을 쌌다며 ‘복수했다’고 괘씸해하는 보호자가 있다”며 “개는 30개월 아이 정도의 정신 연령이라 복수심이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람에게는 문제 행동이지만 개의 세계에서는 정상 행동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설 수의사는 잘못한 개에게 소리를 치거나 회초리를 드는 대신 칭찬하며 가르친다. “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는 “왜 맞는지도 모르고 맞는 개들에게 체벌은 교육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크다.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면 공격성이 강해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이름처럼 세상에는 나쁜 개는 없고 나쁜 보호자만 있는 걸까. 설 수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보호자 탓만 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기준에서 나쁜 기질을 타고난 개도 있기 때문이다. 그 기질에 보호자의 미숙한 대응이 더해질 때 개의 문제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3평짜리 집에서 살아도 산책과 놀이를 함께 해주는 보호자와 사는 개가 100평짜리 집에서 홀로 지내는 개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해요.” 설 수의사는 개의 행복을 위해서는 집의 넓이보다 보호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 갇혀 지내며, 동물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며 “개는 우리처럼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거나 휴대전화로 게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
동물을 키우는 반려인과 동물에 낯선 비반려인 사이 갈등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설 수의사는 “사람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반려인들이 ‘펫티켓(반려동물 예절)’을 잘 지키는 게 최우선”이라고 했다. 그는 “개에게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사료를 먹이고, 개집을 마당이 아닌 거실에 두게 된 것처럼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긴 하다. 하지만 반려인과 비반려인의 괴리가 줄고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사회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한 세대가 걸릴 것”이라고 했다.
설 수의사는 개 물림 사고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철저한 ‘관리’가 필수라고 했다. 그는 “반려견 ‘세상이’과 하루에 한 번 산책하러 나가기 전, 하네스가 끊어져 있지 않은지 매일 확인한다. 10초면 된다. 수의사로 일하며 줄이 끊어져 사고가 생긴 경우를 너무 많이 봤다”고 했다. “때 되면 자동차 정기검진 받고 타이어를 바꾸는 것처럼 동물이 안전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게 관리하는 것이 개의 문제 행동을 교정하는 것보다 먼저”라고 했다.
“개를 인생에서 가족과 일 다음 3순위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개를 키워도 됩니다.” 개를 잘 키우기 위한 조건에 대해 묻자 설 수의사는 “개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친구와 술 먹을 시간을 아껴 개와 산책하고, 사고 싶은 물건을 참고 동물병원에 가야 한다”며 답했다.
“개들은 자동차·아파트처럼 큰 걸 바라는 게 아니에요. 맛있는 거 먹고 하루에 한 번 정도 산책하고 보호자랑 소통하는 게 바라는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