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엘타워’ 후문 앞에서 양복을 입은 남성 등 10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모두 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이달 2일부터 양재동 내 모든 공공 도로(인도+차도)가 ‘금연 구역’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지금은 계도 기간이지만, 내년 1월부터는 걸리면 과태료 5만원씩을 내야 한다. 구청이 마련한 지정 흡연 구역은 면적 13.34㎢ 양재동에 단 30곳. 담배를 피우고 있던 직장인에게 지정 흡연 구역 지도를 보여줬더니 “여기서 가장 가까운 흡연 구역이 횡단보도를 건너가야 하니까 왕복 20분 정도 걸리겠네요”라고 했다.
서초구는 지난 2일부터 양재동 행정구역 내 총연장 약 55㎞의 모든 공공 도로를 금연 구역으로 설정했다. 하나의 행정동(洞) 전체를 금연 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은 전국 최초이고, 해외에서도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인도를 벗어나 차도 끄트머리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자기 승용차 안에서 피우는 것도 안 된다. 오직 바닥에 지정된 30곳에서만 담배를 피울 수 있다. 단순 계산으로 도로 1.8㎞를 걸을 때마다 한 개씩 설치된 수준이다.
서초구는 지정 흡연 구역 위치를 구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안내해놨다. 9일 이 안내를 따라 흡연 구역 몇 곳을 돌아봤다. 양재역 주변 흡연 구역은 바닥에 노란색 페인트로 테두리를 칠해놓은 1평 정도 공간이었다. 성인 남성 8명이 서면 가득 찰 만한 면적. 누군가 테두리 안에 오토바이를 세워놔, 공간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일부러 거기로 찾아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었다.
서울가정법원 맞은편 흡연 구역에 가봤다. 분명 지도상에는 표시가 돼 있는데, 현장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지도상 흡연 구역은 멀쩡히 영업 중인 카센터 바로 앞이었다. 기자가 바닥을 가리키며 “여기가 흡연 구역인 거 아느냐”고 카센터 사장에게 물어봤다. 사장은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었다. 그는 “가뜩이나 우리 가게는 바람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데… 여기서 담배 피우면 연기가 다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주민 흡연자들도 불만이다. 우선 안내 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기자가 취재 중 만난 행인·상인 10여 명 가운데 새로 시행된 금연 정책 자체를 아는 이가 없었다. 이들에게 구청의 ‘의견 수렴 과정’을 알려주자 더욱 화를 냈다. 서초구는 “전문가, 지역 대표, 흡연자 대표와 지난달 21일 간담회를 통해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쳤다”는 입장이지만, 그 흡연자 대표는 ‘양재동 주민’이 아니라 ‘온라인 흡연 커뮤니티 운영자’라고 했다. 양재동에 사는 흡연자 배모(29)씨는 “세금 걷으려고 엄한 사람을 섭외한 것 아니냐”고 했다.
헌법 연구자들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했다. 헌법재판소는 2004년 ‘금연 구역은 흡연자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헌법소원 사건에서 “흡연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는 흡연권보다 상위 기본권”이라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시 결정은 ‘실내 금연 구역’에 관한 것으로 ‘타인의 바로 곁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취지”라며 “그러나 이번 경우는 사실상 담배 자체를 못 피우게 하는 것으로, 과도한 제한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해외에서도 찾기 어려운 사례”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 도쿄 신주쿠구, 미나토구 등은 일부 공공 도로를 전면 금연 구역으로 지정해놨지만, 그 도로에도 흡연 구역이 많고, 크기도 평균 10평 이상으로 널찍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와 이탈리아 등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공원과 광장과 같은 공공장소만 금연 구역으로 정했다.
이런 정책 발상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 ‘코로나 사태’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금연 정책 전문가인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출입명부 작성’ ‘마스크 미착용 시 과태료 부과’와 같은 기본권 제한 정책을 ‘K-방역’이란 이름으로 시행했는데, 국민들도 비상 상황인 만큼 이를 받아들였다"며 “그런 상황이 이어지면서 공권력의 개인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국민들 민감도가 무뎌진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