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은 교수 그림

무더위로 힘겨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계절이 됐습니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은 흘러 이렇게 또 계절을 바꿔 놓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해가 짧아지면 참 신기하지요. 목소리의 톤도 조금 낮아지고, 감정도 자꾸만 가라앉습니다. 햇빛의 양이 줄어서일까요. 마음도 반짝이던 때보다 건조해지고, 바람처럼 차가워집니다. ‘올해도 끝나간다’라는 생각이 겹치면,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곤 합니다. 유난히 아픈 시간을 보낸 분들에게는 이 시기가 더욱 외롭고 힘겹게 느껴지겠지요.

“에휴… 올해는 아프기만 했네.”

“나는 왜 이렇게 지쳤을까.”

그럴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따뜻함일지도 모릅니다.

항암 치료를 받는 분들은 몸의 가장 미세한 감각까지도 고통스럽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저는 항암 부작용으로 늘 후각에 민감해 힘들어하면서도, 손끝이 너무 차갑다가 어떤 때에는 불타는 듯 뜨거워져 얼음이 필요하다고 호소하던 20대 환자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다른 것보다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감각’에 환자분은 보호자였던 어머니를 피해 저를 붙잡고 한참을 우셨습니다.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두려웠다고 후에 말씀하셨고 젊은 자신의 투병을 돕는 엄마가 자신이 우는 것을 보면 더 슬퍼질까 싶어 숨어서 울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상황을 겪고 계신 그 환자분께는 손의 극단적인 감각을 보호하기 위해 시원한 ‘얼음 장갑’과 따뜻한 ‘털장갑’ 그림을 각각 그려 드렸습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얼음 장갑을,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는 털장갑을 떠올리시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환자분은 제 그림을 한참 보면서 “아~ 선생님의 장갑 그림을 보니 불편했던 손끝이 아니라 따듯하고 고마운 마음에 집중하게 되네요”라고 반복해서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환자분은 무사히 퇴원하셨고, 외래 진료 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자신에게 전해줬던 장갑 그림에 대한 답례라며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직접 그린 털장갑 그림을 제게 선물로 건네주셨습니다. 작은 고마움의 표현이라고 하시면서요. 많이 회복하신 환자분과 손을 잡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 환자분이 주신 털장갑 그림을 보면서 그분의 건강 회복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아주 작은 그림 한 장이라도, 그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감각’과 ‘위로’를 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이제 한 장만 남은 달력 앞에서 왠지 모를 우울함이나 지침을 느끼고 계신다면 잠시 멈춰 서서 올겨울을 준비하는 ‘나만을 위한 장갑’을 그려보기를 제안합니다. 잘 그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장 나를 포근하게 감싸줄 것 같은 장갑을 종이 위에, 혹은 마음속에 그려보세요. 어떤 색깔인가요? 어떤 재질인가요? 털실로 촘촘하게 짜여 있나요, 아니면 부드러운 캐시미어인가요?

힘겨웠던 한 해 동안 굳건히 버텨준 나의 소중한 손에 향기 좋은 핸드크림을 천천히 발라주고, “올 한 해 정말 수고 많았어.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속삭여 주세요.

여러분이 자신을 위해 그려보는 이 털장갑은 단순히 겨울을 나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는 ‘이 겨울, 내 자신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약속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외로움, 두려움, 그리고 우울감을 이 보송한 장갑으로 감싸 안고 보호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내가 나를 위한 장갑을 그렸다는 것 자체가, 곧 나는 내 자신을 돌보는 힘이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혹시 지금, 장갑을 그릴 힘조차 없다고 느끼는 분이 있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위해 가장 포근한 벙어리 장갑을 그려 드립니다. 이 장갑이 여러분의 복잡한 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보호하는 작은 방패가 되어,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전해주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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