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면, 마음은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색과 성찰의 시간이 돌아온다. 그런데 바로 이때, 많은 사람들이 뜻밖의 고통을 겪는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있는 요양병원을 다녀오는 길, 그분은 집 앞에서 잠시 서 있었다고 했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들어가기 싫었다고 했다.

“괜히 발걸음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그날 밤, 잠은 조금 나아졌지만 생각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

‘나는 아내에게 잘한 남편이었을까.’

‘이제 내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지.’

상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단계에서 더 괴로워진다. 몸은 조금 회복됐는데, 마음은 오히려 더 아프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

“차라리 처음이 나았던 것 같다.”

여기서 흔히 생기는 오해가 있다.

상실 이후의 고통은 슬픔이 깊어져 서가 아니다. 질문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에 커진다.

상실 후 불면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우울할 수 있다. 계속해서 의미를 찾는다면 자책으로 이어지게 된다. /셔터스톡

왜 의미를 찾을수록 더 괴로운가

이 시기의 마음은 본능적으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유 없는 고통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점점 커진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왔을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문제는 이 질문들이 지금의 마음 상태에서는 답이 나오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점이다. 상실 직후의 뇌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이 상태에서 삶 전체를 평가하려 들면, 마음은 사실보다 죄책감과 후회로 빈칸을 채운다. 그래서 의미 찾기는 위로가 아니라 자책이 된다.

나 역시 우울을 겪던 시기에 비슷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밤마다 되새기며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건 성찰이 아니라 ‘루미네이션(생각의 되새김질)’이었다.

이 지점에서 상담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의미치료(로고테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은 아내를 잃은 한 남성의 상담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 남성은 “아내를 잃고 나서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프랭클은 그의 슬픔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만약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면, 아내는 어떤 고통을 겪었을까요?”

그 남성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아마… 아주 힘들어했을 겁니다.”

프랭클은 그제야 조용히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그 고통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겁니다”

프랭클의 요지는 단순했다. 고통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어떤 태도로 감당할 지는 각자 선택할 수 있다고.

그래서 이 단계에서 필요한 건 더 깊은 해답이 아니다. 질문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상실의 2단계에서 내가 권하는 원포인트 레슨은 이것이다.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고, 역할에 대한 질문을 하라.”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역할은 아주 작아도 충분하다.

  • 오늘 아침 일어나 산책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
  • 밥 한 끼를 챙겨 먹는 사람
  • 약속한 시간에 밖으로 나가는 사람
  • 아파트 경비원이나 이웃과 인사 나누는 사람
  •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
  • 주말에 집안 청소를 하는 사람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역할부터 찾아보자. 아직은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셔터스톡

이건 삶의 의미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의미는 회복의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에 가깝다.

상실 이후의 마음은 한동안 큰 질문을 감당하지 못한다. 대신 작은 역할을 반복하며 다시 삶에 발을 딛는다. 그 과정 속에서 의미는 질문하지 않아도, 뒤늦게 따라온다.

지금 의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아직 그 질문을 할 단계가 아닐 뿐이다. <계속>

▶<마음건강 길>에서 더 많은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