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봉사활동을 하는 보육원에서 유독 마음에 남는 아이가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경일이(가명)다. 영리하고 예의 바르며, 식사 예절도 좋았다. 나를 보면 먼저 다가와 손을 잡았다.
하지만 보육원 안에서의 평판은 전혀 달랐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바닥에 드러눕는 아이.
교사에게 대들고 감정이 폭발하는 모습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안에는 ‘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하고 있었다.
경일이는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진단을 받았고, 증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아 비교적 많은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몇 차례 따로 만나 차분히 타이르기도 했지만, 충동 앞에서 말은 힘을 잃었다.
병원 설명은 분명했다. ADHD는 의지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뇌 신경회로의 조절 어려움이다. 감정과 에너지가 갑자기 솟구칠 때, 아이는 생각으로 멈출 수 없다.
경일이는 출생 직후 베이비박스를 통해 보호를 받다 입양된 아이라 초기 배경 정보도 제한적이었다. 약물치료가 우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육원에서 감당이 어려워져, 서울시 치유센터로 6개월간 위탁을 가게 됐다.
미술치료 받고 달라진 경일이
넉 달쯤 지나 센터로 경일이를 찾아갔다. 놀랍게도 경일이는 눈에 띄게 안정돼 있었다. 또래, 형, 동생들과도 잘 어울린다고 했다.
변화의 중심에는 미술치료가 있었다. 매주 한두 시간, 그리고 만들며 마음을 풀어냈다. 미술치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긴장을 그림이나 조형 활동으로 밖으로 꺼내는 방식이다. 억눌린 분노와 불안을 상징으로 드러내며 마음의 균형을 찾도록 돕는다.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이 아이는 관계 욕구도 크고 정서도 풍부해요. 문제는 감정이 치솟을 때 다루는 방법을 몰랐다는 거죠. 억누르는 아이보다 이렇게 표현하는 아이가 오히려 회복 가능성이 큽니다. 중요한 건 폭력이 아니라, 순화된 출구예요.”
그 말은 어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운동, 명상, 음악 등으로 스트레스를 푼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에게 맞는 출구를 찾아 주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그날 저녁, 경일이와 고깃집에 갔다.“뭐 먹고 싶어?” 묻자 아이는 수줍게 “고기요”라고 했다. 예전엔 식욕이 없던 아이가, 그날은 고기를 잘 먹었다.
“여기 와서 형들도 많이 사귀었어요.”아이의 말엔 자랑이 묻어 있었다.
나는 운동을 배워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경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사는 왜소한 체구에 대한 위축감이 공격성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운동은 에너지를 건강하게 풀고, 자기 몸에 대한 신뢰를 키워주는 또 다른 출구가 될 수 있다.
헤어지며 책 한 권과 감사일기장을 건넸다.“고마운 일이 떠오르면 한 줄만 적어봐.”경일이는 두 손으로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마음의 출구를 찾으면, 아이도 어른도 달라진다
돌아오는 길, 작년에 만났던 영국의 저명한 미술치료사의 말이 떠올랐다.“마음의 치유에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다.”
약이 필요할 때도 있고, 그림·음악·운동·놀이가 더 잘 듣는 경우도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자기 마음이 빠져나갈 안전한 출구를 찾는다면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출구를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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