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은 그 사람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이는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에 대한 신뢰를 배운다.
그러나 ‘충분한 사랑’이란 모든 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자녀의 욕망을 수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히 거절한다.
아이는 그 과정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고, 욕망을 조절하며, ‘좋음과 나쁨이 뒤섞인 현실’을 배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대상항상성(object constancy)’이라 부른다. 부모에게 실망해도 좋은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힘.
부모가 완벽히 좋은(all good) 사람도, 완전히 나쁜(all bad) 사람도 아니듯, 세상도 그렇다. 이 복합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존재가 된다.
정치의 집단적 퇴행
그러나 지금의 정치 현실을 보면, 이런 성숙이 무너졌다. 정치인들은 세상을 유-불리로만 보고, ‘내 편이냐, 적이냐’로 나눈다. 이성보다 감정, 공공선보다 사적 이익이 앞선다.
원래 정치는 서로 다른 가치와 의견을 조율하는 예술이어야 하나, 이제는 오히려 갈등을 확대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산업이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대상항상성’이 결여된, ‘정치적 퇴행(political regression)’이다. 좋음과 나쁨을 통합하지 못한 채, “나에게 유리하면 선, 불리하면 악”으로 판단하는 유아적 심리. 이 흑백논리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충성하면 “좋은 사람(all good)”, 비판하면 “나쁜 사람(all bad)”으로 몰아붙인다.
우리 정치도 다르지 않다. 세상은 복잡한 회색지대인데, 정치의 언어는 원색으로 물들고 있다.
IT시대, 속도의 함정
그 배경에는 IT혁명과 스마트폰 문명이 있다. 21세기 이후 세상은 속도로 움직인다. 모든 정보는 빠르고 간단해야 하고, 좁은 화면에 담기려면 문장은 짧고 표현은 강렬해야 한다.
이 구조 속에서 인간의 사고는 단선화되고, 복잡한 사유와 여백, 맥락은 사라졌다. 이성보다 감정이, 숙고보다 즉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버드 의대 연구팀은 “스마트폰의 잦은 사용이 사고의 깊이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을 지속적으로 피로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게 이익이 되는가’, ‘욕망이 충족되는가’로 판단한다. 세상은 은유를 잃었고 인간은 점점 유치해져 ‘디지털적 유아화’의 길을 접어든 셈이다.
사유의 회복이 성숙의 시작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거창한 제도 개혁보다 먼저, 우리의 일상에서 스마트폰과의 거리두기가 시작이어야 한다.
허구한 날 화면을 들여다보는 한, 우리는 조급함과 비교, 분노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정보는 늘어나도 사유는 줄어든다.
아날로그의 미덕을 되살려야 한다.
기다림 속에서 생각하고, 침묵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때로는 판단을 유보하는 여유.
그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좋음과 나쁨을 함께 견디는 힘’을 되찾는다.
언젠가 스마트폰도 담배나 코카콜라처럼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유해물질로 분류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 우리부터 먼저 ‘사유의 품격’을 회복해야 한다. 성숙한 인간만이 성숙한 사회를 만들고, 성숙한 사회만이 성숙한 리더를 낳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