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연휴 기간에 시청하던 중 한 장면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주인공 애순이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엄마는 가난했고, 못 배웠고, 말수가 적었다. 매일 일에 찌들어 있었지만, 애순이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한 존재였다. 살아생전 “엄마 사랑해요” 한마디 못했지만, 세월이 흘러도 애순이 마음 한가운데엔 늘 엄마가 있다.

애순이 엄마는 설명도 이론도 필요 없는, 그야말로 본능적인 사랑을 보여주었다. 자식 앞에서 ‘나’는 거의 지워진 존재였다. 자식이 전부였고, 자식에게는 그 전부가 전해졌다.

그러나 지금의 어머니들은 다르다. 똑똑하고, 바쁘고, 복잡하다. 육아서를 읽고, 심리 강연을 들으며, 감정 코칭도 배운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쓴다.

애순이 엄마가 애순이에게 구운 조개를 먹여주고 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영상캡처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진료실을 찾는 10대 청소년들이 늘고 있다. 불면증, 불안장애, ADHD, 자해 충동. 국내 청소년의 20% 이상이 우울 증상을 겪고 있고, 자살은 여전히 사망 원인 1위다. 수도권 병원 예약은 4~6주 대기다.

병원을 찾는 많은 아이들이 ‘엄마는 내 마음을 몰라요’라고 말한다. 물론 엄마들은 애쓰고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시도하고, 놀아주기도 한다. 그런데도 왜 연결되지 않을까?

까뮈의 <이방인>과 21세기형 엄마

알베르 까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눈물도 없고, 장례식장에서 하품까지 한다.

오랫동안 ‘비정한 아들’의 표상이었던 이 장면은, 현대 심리학에서는 ‘정서적 단절’로 읽힌다.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결되지 못해서 무감(無感)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아이들도 정서적 단절을 경험한다. 엄마는 곁에 있지만, 마음은 멀리 있다. 애순이처럼 품에 안기고 싶지만, 불안하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엄마도 아이도 지쳐 있다.

21세기 어머니는 자의식과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린다. 20세기 애순이 엄마는 자식이 삶의 전부였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자신도 돌봐야 한다.

자식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는 어머니부터 마음이 단순하고 평온해져야 한다. 그래야 고요한 에너지가 아이에게 전해진다. /셔터스톡

자녀 치유는 어머니의 평온에서 시작된다

애순이 엄마의 시대엔 정보도, 상담도, 이론도 없었다. 대신 손과 발, 눈빛과 촉감이 있었다.

그걸로 서로 연결되고 사랑을 나눴다.

지금은 많은 것을 알고, 많이 갖췄지만 정작 제대로 마음을 건네지 못한다.

그렇다고 애순이 엄마처럼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다만 오늘,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잘 지냈어?”라고 물어보자. 휴대폰을 내려놓고, 손을 잡고, 잠시 안아주자.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이 전해지는 건 엄마의 마음 상태다. 아무리 함께 있어도,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엄마의 마음이 불안하고 복잡하면 그 진심은 아이에게 닿기 어렵다.

어머니부터 마음이 단순하고 평온해져야 한다. ‘엄마, 지금 괜찮아’라는 마음을 가질 때 그 고요한 에너지가 아이에게 전해진다.

자기 자신에게 다정한 사람이, 타인에게도 따뜻할 수 있다. 마음의 평화는 전염된다. 그것이 2025년, 우리가 되살릴 수 있는 ‘애순이 엄마의 사랑’ 아닐까.

▶<마음건강 길>에서 더 많은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