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AFP 연합뉴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31일 연례 ‘국가별 무역 장벽(NTE) 보고서’를 작성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이날 “대통령은 관세를 활용하고 협상을 통해 해외 시장을 개방하는 한편 수십 년간 지속된 불공정 무역 관행을 계속해서 바로 잡고 있다”고 했는데, 보고서는 한국 내 각종 ‘비(非)관세 장벽’을 망라하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미 빅테크 기업들의 불만이 상당한 공정거래위원회의 플랫폼 규제 법안, 위치 기반 데이터 등의 국외 반출 제한, 망 사용료 정책, 결제 서비스 장벽과 복잡한 인증·보안 기준, 공공 시장에 대한 외국 클라우드 사업자의 입찰 제약 등이 두루 언급됐다.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이른바 ‘노란봉투법’도 한국의 주목할만한 노동 환경 변화 중 하나로 언급됐는데, 현재 USTR이 301조 조사를 진행하고 있어 추후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 쿠팡 사태 속 한국 내 ‘디지털 장벽’ 총망라

지난 2월 미 하원 법사위에 출석해 증언한 해롤드 로저스 쿠팡 한국법인 임시대표. /뉴스1

트럼프 정부는 자국 테크 기업에 대한 외국 정부 규제에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데, 현재 이와 관련해 USTR 등이 한국 상황 전반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고서는 공정위, 국회 등을 포함한 우리 정부가 글로벌 및 한국 내 매출 기준을 충족하는 디지털 서비스 제공 업체에 대한 다양한 제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런 제안은 한국 시장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다수의 미 대기업에 적용되는 반면 다른 많은 주요한 한국 및 다른 나라 기업은 제외된다”며 미 기업들이 이 문제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소통 개선을 촉구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는 우리 정부의 플랫폼 규제 법안 등을 지적한 대목으로, 지난해 쿠팡 사태 등을 계기로 한미 간 통상 협의 때도 이 문제가 꾸준히 제기됐다. 그리어는 지난 2024년 본지 인터뷰에서 플랫폼법이 “중국 기업에만 득이 될 것”이란 취지로 얘기한 바 있다. 미 조야(朝野)에서는 낮은 조사 개시 기준, 사실상의 영장과 같은 효과를 내는 ‘임의 제출’ 같은 공정위의 조사 관행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고 의회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다.

보고서는 산업부가 미국 클라우드 제공업체가 데이터를 해외로 유출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공 시장 등에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미국의 이해관계자들은 새 지침을 활용하기 위해 산업부와 협력해 왔다”고 했다. 정부의 디지털 전환 정책에 따라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의 공공 클라우드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클라우드 보안 인증제(CSAP)’ 등급을 확보해야 하는데, 아마존웹서비스(AWS)·마이크로소프트(MS) 같은 미국 빅테크는 CSAP가 요구하는 조건이 한국 업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오랜 기간 불만이 상당했다. 반면 국가정보원 등은 보안상의 이유로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 국회에 넷플릭스 같은 외국 콘텐츠 업체가 한국 내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ISP)에 네트워크 사용료를 내야 한다는 법안이 다수 상정된 가운데, 보고서는 이게 “한국 내 3대 주요 통신사의 과점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 콘텐츠 산업에 해를 끼치는 반경쟁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보고서는 이와 함께 데이터의 국외 이전이 사실상 어려운 점도 언급했는데 “2025년 12월 31일 기준 한국이 해외 업체로부터 여러 신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도나 위치 기반 데이터의 반출을 단 한 건도 허가한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 현지에 데이터 센터 등을 둘 것을 명시한 기준에 대해서는 “외국 기업을 차별하는 것” “한국은 위치 기반 데이터 반출에 대한 이런 제한을 유지하고 세계 유일의 주요한 시장”이라고 했다. 다만 이 보고서가 명시한 시점 이후인 지난 2월 우리 정부는 미국 측 압박 속 구글이 요구해 온 1대5000 고정밀 국내 지도 데이터 국외 반출을 2007년 이후 19년 만에 조건부로 허용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소관의 개인정보보호법(PIPA)이 2023년 대폭 개정 돼 서비스 제공 업체에 한국 내 매출이 아닌 전 세계 매출을 기준으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는 점도 ‘서비스의 국경 간 제공에 장벽을 조성하는 것’이라 명시됐다. 개보위는 앞서 구글, 메타 등을 상대로 동의 없는 개인정보 수집 등을 문제 삼아 수백억원대 과징금을 부과했고 여기에 대한 미 기업들 불만도 상당했다.

◇ 월령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 제한 지적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왼쪽)와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1월 만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한편 보고서는 한국의 쌀 시장에 대해서는 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등이 주도하는 미국산 쌀 할당량에 대한 매입·배분 과정을 문제 삼으며 “이해관계자들이 지속적으로 투명성에 관한 우려를 제기해 왔다”며 “시장 공급이 불규칙해 미국산 쌀 대부분이 주류 생산용으로 전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고기 수입과 관련해서는 2008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따라 월령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는 수입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언급하며 “이 과도기적인 조치가 18년 동안 유지돼 왔다”고 했다. 이밖에 한국 염전에서의 강제 노동 문제를 언급하며 “한국은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을 통해 생산된 물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물품들이 한국 시장에 유입돼 경쟁하는 것이 가능하고, 복합적으로 작용할 경우 인건비가 인위적으로 억제될 수 있다”고 했다. 강제 노동은 현재 USTR이 한국 등 60여 국을 상대로 무역법 301조 조사를 진행 중인 사안 중 하나다.

지난해 8월 국회를 통과해 지난 10일부터 시행 중인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도 한국 시장 내 노동 환경의 변화 중 하나로 언급됐다. 이 법은 사용자 범위 확대, 손해배상 청구 제한을 통해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 및 결사의 자유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암참(AMCHAM·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시행을 앞둔 지난해 12월 “법의 취지 자체는 존중하지만 기업들은 실제로 어떤 변화가 발생할지에 대해 보다 명확한 가이드가 필요하다”며 사실상의 반대 입장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