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3일(현지시각) 이란과 핵무기 포기, 고농축 우라늄 회수, 호르무즈 해협 개방 등을 포함한 “15개 쟁점에 대한 합의가 거의 이뤄졌다”고 밝히면서 중동 전쟁이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이란측은 공식적으로는 “미국과 협상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로이터통신은 이날 파키스탄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미국의 JD 밴스 부통령, 스티브 윗코프 특사,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 제러드 쿠슈너가 이르면 이번주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이란 당국자들과 만나 종전 협상을 벌일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지상전에 투입될 수 있는 미 해병대가 중동으로 향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주 양측 협상은 종전과 확전 향방을 가를 중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1일 ‘48시간 내 호르무즈 해협 개방하지 않으면 발전소 초토화’ 통첩을 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5일간의 공격 유예 방침을 밝히면서 “이란 최고위급 인사와 협상을 했다. 이란의 태도가 진지하다”고 했다. 트럼프가 전쟁 개시 이후 이란과 대화를 공식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양국은 파키스탄과 이집트, 여러 걸프국 중재를 통해 간접 소통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외무부도 “몇몇 우호국을 통해 전쟁 종식을 위한 미국의 협상 요청 메시지를 받았으며 이란의 원칙적 입장에 따라 적절히 응답했다”고 했다. 다만 이란측은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미국과 직접 협상·대화는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란측 협상 창구로 지목된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국회의장은 “금융·석유 시장을 조작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이 빠진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짜 뉴스가 이용되고 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아직 협상은 초기 단계이지만, 트럼프가 본인의 위협발언(48시간 시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진척사항을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협상의 실체는 있지만, 아직 성과를 기대하기는 이르다는 것이다.
◇트럼프 “호르무즈 공동 관리” 이란 “배상부터”… 갈 길 먼 종전 협상
외신과 전문가 분석을 종합하면, 호르무즈 해협 개방 문제를 비롯해 ▲이란의 우라늄 농축 중단 또는 감축 ▲핵물질 외부 반출 ▲탄도미사일 5년간 개발 제한 ▲종전 후 이란 안전 보장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원심분리기 외부 사찰, 이란의 전쟁 피해 배상, 중동 미군 기지 문제, 이란의 대리 세력 지원 금지 등도 의제다.
트럼프는 호르무즈 해협 문제와 관련해 “나와 아야톨라(이란 최고 지도자)가 공동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지난달 28일 개전 연설에서 ‘이란 정권 교체’를 언급한 것과 달리 신정(神政) 체제를 용인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다만 이란은 “호르무즈는 우리가 전면 통제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은 트럼프가 자체적으로 ‘승리’를 선언하고 미군을 철수할 경우 이란이 추후 호르무즈 해협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통행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크다며 “국제 시장에서 전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세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란은 “우라늄 농축을 줄이고, 60% 고농축 우라늄 비축량을 조절하는 논의에 참여할 의향이 있다”고 미국 측에 밝혔다고 한다. 이란이 보유한 고농축 우라늄은 400㎏ 이상으로 핵탄두 10기를 만들 수 있는 분량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이를 두고 ‘졸속 협상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다. 트럼프 역시 “이란은 핵무기를 갖지 않을 것이며 ”협상이 타결되면 우리가 직접 가서 그것(고농축 우라늄)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6월 이란 본토를 최초로 공습, 핵 시설 3곳을 파괴한 뒤 핵 협상을 벌였으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공습과 현 전쟁 국면에도 우라늄을 보존하며 ‘협상 카드’로 삼고 있는 이란 입장에서도 우라늄을 미국에 모두 내주기는 쉽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또 지난달 핵 협상 도중 갑작스럽게 자국을 타격한 미국에 대해 ‘더는 믿을 수 없다’는 이란 내 경계심도 상당하다. 영국 가디언은 “이란이 우라늄 농축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는 것은 엄청난 진전”이라고 했다.
이란은 미국이 공격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데서 나아가 ‘배상’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법을 위반하고 불법 침공한 만큼 그에 상응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배상 요구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입장이지만, 미국이 핵 제재와 관련한 동결 자산을 반환하고 이란이 이를 배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의 우회로는 가능하다고 미 악시오스는 보도했다.
이란의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5년간 중단, 미사일 보유량을 1000기 이하 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원심분리기 사찰 허용 등은 미국과 이란이 전쟁 이전에도 합의를 시도하던 쟁점이다. 이란 역시 일부 수용 의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란이 요구하는 ‘중동 내 미군 기지 전면 폐쇄’는 미국이 용납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란의 ‘대리 세력 지원 중단’과 조건부 협상을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전쟁 종식 목표일을 4월 9일로 설정했다”며 “향후 3주는 협상과 공격이 병행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란의 에너지 시설을 제외한 표적을 대상으로는 공습을 지속하는 상황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도 “공격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이란 역시 이스라엘과 중동국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중재자를 자처하는 셰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 통화한 뒤 “평화를 위한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동맹이지만 미군 기지는 없어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받지 않았다. 또 이란과는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로, 시아파 무슬림이 많아 양국은 오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