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19일(현지시각) 백악관을 찾은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이란의 핵무기 개발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규탄한다”면서도 자위대 파견에 대해선 즉답을 피했다. 다카이치는 정상회담 후 기자들에게 “일본 법률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트럼프에게) 명확하게 설명했다”고 했다. 평화헌법 체제에서 당장 자위대 파견은 사실상 힘들다는 점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다카이치는 대신 미국산 원유 증산 협력, 대규모 대미 투자 약속 등 ‘선물 보따리’를 풀어놨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일미군 숫자 등을 언급하며 “일본이 더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일본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달리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려 한다”고 했다. 일본의 안보에 미국이 기여하는 만큼 일본도 어떤 식으로든 상응하는 역할을 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일본 내에선 다카이치가 공개된 자리에서 자위대 파견을 압박받거나 일부 유럽 정상처럼 트럼프에게 면박을 당하는 최악의 전개는 피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려운 판단을 요구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날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호르무즈 해협’ 문제는 다카이치가 먼저 꺼냈다. 그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용인할 수 없다. 일본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도 지속 규탄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안도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다카이치가 먼저 이란을 비판한 것은 트럼프가 회담 서두에 강한 압박에 나설 가능성을 누그러뜨리고, 일본 입장을 명확히 하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병 압박 트럼프에… 다카이치, 즉답 대신 730억달러 선물 보따리
트럼프는 “세계는 앞으로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라는 점에 총리는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이란이 해온 일에 대해서도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일본으로부터 매우 큰 지원을 받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관계도 매우 좋다. 어제 그제 우리에게 전달된 메시지를 보면 일본은 한층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하고 있다. 나토와는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4만5000명의 (주일미군) 병력이 있고, 막대한 자금도 지원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의존도도 90%”라며 “일본이 더 나서주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군함 파견 같은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파병 대신 “유가 안정 기여”로 우회
트럼프는 비공개 회담에서도 호르무즈 해협의 안전을 위한 일본 등 각국의 기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카이치는 약 1시간 30분 회담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나 “대화 성격상 민감한 부분이 있었지만, 해협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며 “일본 법률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고 말했다. 법률 범위란 아베 신조 정부 때인 2020년 ‘조사·연구’ 목적으로 함정을 파견한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지만, 다카이치는 앞서 “전쟁이 멈추는 게 조건”이라고 한 바 있다. 아사히신문은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됐다”며 “구체적인 사례를 가정한 논의까지는 없었다”고 전했다.
회담에 동석했던 오자키 마사나오 일본 관방 부장관은 “한마디로 회담은 성공적으로 진행됐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며 “대면 회담은 두 번째였지만, 두번째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신뢰의 끈을 느꼈다. 다양한 현안에 대해 솔직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다카이치는 대신, 에너지 가격 안정을 위한 노력에 나서겠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알래스카산 원유 증산을 위해 유전을 공동 개발해 일본에 비축하고, 미국에 730억달러를 투자해 차세대 소형 원자로(SMR)와 천연가스 발전소를 지어 에너지 가격을 낮추는 데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에너지 가격 급등 문제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코너에 몰린 트럼프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 밖에 일본은 미사일 공동 개발·생산을 통해 미일 안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의 희토류 규제에 맞선 일본 미나미토리시마 해저 희토류 채굴 사업에 미국을 참여시킴으로써 경제 안보 협력도 강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김정은 만남 열망... 중국엔 ‘열려있다’”
한편 다카이치는 회담에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개인적으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고 있음을 전달했다”며 “다양한 방식으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역대 일본 총리는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추구해 왔다. 다카이치는 내각 출범 후 장관들과 함께 납북 일본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파란색 리본 배지를 옷에 달고 다니는데, 이날도 파란색 정장에 이 배지를 달았다. 백악관은 양국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미·일 협력 강화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미국은 (북한으로의) 납치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을 위한 일본의 결의를 지지한다”고 했다. 이날 다카이치는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냉철하게 대응하고 있지만, 중국에 늘 ‘오픈’돼 있다”고 말했다. 양국은 대만해협, 양안(兩岸) 문제에 대해 “무력이나 강압을 포함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유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