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일 켄터키주 헤브론 소재 버스트 로지스틱스(Verst Logistics)를 방문해 연설하고 있다. 버스트 로지스틱스는 다양한 브랜드를 대상으로 포장, 수축 라벨링, 운송 관리 등을 담당한다./AFP 연합뉴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11일 한국, 일본, 중국 등 16국을 상대로 하는 ‘무역법 301조(Section 301)’ 조사를 개시한다고 밝혔다. 1974년 제정된 무역법 301조는 미 기업에 대한 외국 정부의 불공정 행위가 있을 경우 추가 관세 부과, 수입 및 서비스·투자 제한 같은 보복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돼 있다. 특히 관세를 한 번 부과하면 계속 올릴 수 있고, 한계도 없는 편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이날 백악관이 주관한 전화 브리핑에서 “이번 조사는 지속적인 대규모 무역 흑자를 내는 나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제조업 분야의 구조적 과잉 생산(structural excess capacity and production in manufacturing)과 관련된 주요 교역 상대의 불공정 무역 관행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쿠팡 사태로 불거진 자국 테크 기업에 대한 차별 같은 ‘디지털 장벽’에 관한 추가 조사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날 그리어가 밝힌 조사 대상국은 한국을 비롯해 중국, 유럽연합(EU), 싱가포르, 스위스, 노르웨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대만, 방글라데시, 멕시코, 일본, 인도 등 16국이다. 그리어는 “경상수지 흑자, 미국과의 양자(兩者) 무역 흑자, 유휴(遊休) 생산 능력 등 다양한 방식으로 과잉 생산 능력의 징후를 보이고 있다”며 “국내 및 글로벌 시장 수요와 완전히 분리된 생산 능력을 구축해 왔다는 것이 우리 견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사를 시작해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나라마다 다를 수 있는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 연방 관보에 관련 내용이 게재됐고, USTR은 ‘301조 위원회’를 꾸려 17일부터 다음 달 15일까지 의견을 접수해 5월 5일 공개 청문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리어는 “이 기간 조사 대상인 무역 파트너들과도 협의할 예정”이라며 “USTR은 조사 결과를 분석해 관세 부과, 서비스 분야 제재 같은 다양한 조치를 시행할 수 있다”고 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 대표(오른쪽)과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지난달 20일 백악관에서 질문을 받고 있다. /AFP 연합뉴스

한국을 포함한 조사 대상국 대부분이 트럼프 정부 들어 무역 합의를 이룬 상태다. 그리어는 “대부분의 나라가 협정을 유지하고 준수하는 데 관심을 표시했다”며 기존 합의는 독립적으로 유지된다는 취지로 얘기했다. 또 과거 중국에 대한 301조 조사 이후 미·중이 합의에 이른 사례를 언급하며 양자 협의를 통한 협상 가능성도 열어뒀다. USTR은 EU의 디지털 서비스세, 우리 정부의 플랫폼 규제 입법 등 자국 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이런 디지털 분야 ‘비관세 장벽’을 겨냥한 추가 301조 조사 가능성도 예고했다. 그리어는 지난달 20일 USTR이 발표한 성명에 디지털 서비스, 의약품 가격 책정 등이 언급됐다는 사실을 가리키며 “다른 사안들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301조 조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 문제들은 반드시 다뤄야 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쌀, 수산물 등 특정 산업 분야에서 “(해양 오염 등) 타국 상황에 대한 우려가 존재한다”고도 했다.

이번 조사는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따른 국가별 상호관세 무효화한 이후 추가로 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고된 조처다. 그리어는 조사 기간과 관련해 “150일 기간을 인식하고 있다”며 목표는 트럼프가 연방대법원 판결 이후 무역법 122조를 활용해 부과한 10% ‘글로벌 관세’가 만료되기 전에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USTR은 이날 공개한 그리어 명의로 된 성명에서는 “미국은 더 이상 과잉 생산 문제를 우리에게 수출하는 다른 나라들에 산업 기반을 희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러 부문에서 발생하는 구조정 과잉 생산으로 인해 트럼프 정부의 재산업화 노력이 상당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이어 “이런 과잉 생산은 기존 미국 내 생산을 대체하거나 그렇지 않았으면 미국에서 가동됐을 제조업에대한 투자, 확장을 방해한다”며 “많은 분야에서 미국은 국내 생산 능력을 상실했거나 외국 경쟁사들에 비해 우려할만한 수준으로 뒤쳐져 있다”고 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왼쪽)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8일 인천국제공항에 귀국해 취재진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뉴스1

USTR은 이달 2일 공개한 ‘2026 무역 정책 어젠다’에서 “무역법 301조 등을 활용해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조치에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발표는 열흘도 안 돼 이뤄진 것이다. 한국에 대해 “대규모 또는 지속적 무역 흑자를 통해 구조적 과잉 생산의 증거가 보여진다”며 관련 분야로 전자 장비, 자동차와 차 부품, 기계, 철강, 선박 등을 꼽았다. 이에 따라 한미 간 통상 테이블에 무역법 301조 조사 문제가 계속해서 테이블 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정부는 지난 6일 김정관 산업부 장관 등이 워싱턴 DC로 와서 카운터 파트와 협의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월 쿠팡과 관련해 한국 정부의 차별이 있었다며 USTR에 무역법 301조 조사를 청원했던 기관 투자자 그린오크스 등이 최근 이를 철회했지만, USTR 관계자는 본지에 “미국 디지털 기업이 한국 시장에서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강제하고,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차별 없이 진행할 것을 계속 촉구하겠다”고 했다.

연방대법원이 지난달 트럼프 상호 관세가 위법하다고 판단한 가운데, 그리어는 이날 “미국 일자리를 보호하고 교역 상대와의 공정한 무역을 보장하는 대통령의 무역 정책은 변함이 없다”며 “법원의 변덕이나 기타 사정에 따라 수단은 달라질 수 있지만 정책은 동일하다”고 했다. 백악관 관계자도 “정부가 지속적으로 밝혀왔듯이, 대통령은 국민 소득과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의회가 부여한 다수의 관세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USTR은 66국을 상대로 ‘강제 노동(forced labor) 생산 상품 수입 금지 및 미국 내 효과적 시행’과 관련된 301조 조사도 12일부터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