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자국 테크 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의 차별에 책임을 묻겠다며 한국의 디지털 분야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무역법 301조 조사를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무역법 301조는 미국 기업에 대한 외국 정부의 불공정 행위가 있을 경우 추가 관세 부과, 수입 및 서비스·투자 제한 같은 보복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교역 상대 압박 성격의 통상 카드다. 자국 테크 기업에 대한 외국 정부의 규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 온 트럼프 정부의 비(非)관세 장벽 해제 요구가 한층 더 거세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중국·브라질 등에 무역법 301조를 시행중이지만, 핵심 동맹국에 이의 적용을 추진하는 것은 처음이다.

지난 1월 대규모 개인 정보 유출 사태가 불거진 쿠팡과 관련해 우리 정부가 차별을 했다며 USTR에 무역법 301조 조사를 개시해달라는 청원을 넣었던 쿠팡의 미국 내 기관 투자자 그린오크스·알티미터는 9일 보도자료에서 “USTR이 한국 정부에 대한 책임을 묻기로 하고, 이를 위해 광범위한 301조 조사를 추진(initiate broader Section 301 investigations)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에 따라 청원을 철회했다”고 했다. USTR은 청원을 받으면 45일 내 조사 개시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그 시한이 지난 7일이었는데, 특정 기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 미 기업의 공정한 경쟁 환경을 위해 한국 내 상황에 대해 보다 포괄적인 조사를 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외교 소식통은 “USTR이 조사 개시 통보 시점을 내부적으로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6일 워싱턴 DC를 방문해 “301조 조사가 개시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지만, 한미가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쿠팡 문제를 넘어 그간 미측이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한 한국의 온라인플랫폼법, 넷플릭스·유튜브 등에 대한 통신망 사용료 부과, 클라우드 보안인증(CSAP) 같은 이슈가 한미 간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미 조야(朝野)에선 한국 공정위의 조사 관행, 영장 없이도 같은 효과를 내는 임의 제출 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USTR은 이르면 이달 말 발간해 의회에 제출할 ‘비관세 장벽’ 보고서에서 이런 사안을 망라해 공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왼쪽)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8일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에 도착해 취재진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뉴스1

USTR은 이달 2일 공개한 ’2026 무역 정책 어젠다’에서 비관세 장벽 같은 구조적 무역 장벽을 해결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무역법 301조 등을 활용해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조치에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지난달 브라질과 중국에 대한 301조 조사를 개시했고, 아시아 여러 나라의 공급 과잉에 대한 조사도 곧 개시할 예정이라 밝혔다. 또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해 미국 쌀 농가를 죽이는 해외 쌀 시장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었다. 바이든 정부에선 중국의 반도체, 조선·해운 산업 등을 상대로 무역법 301조를 활용한 전례가 있다.

외교 소식통은 “통상 조사가 1년정도 걸리는데 트럼프가 속도전을 지시하면 기간을 단축해 6개월 내 조사를 마무리 할 수 있다”고 했다. USTR이 조사를 개시해도 당장 관세 부과 같은 보복 조치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과 산업계, 외국 정부로부터 의견을 수렴하고, 공청회도 거쳐야 한다. 이 기간 USTR이 통상 상대국과 협의도 진행하는 데 문제가 된 정책을 수정하고 시장 개방, 규제 완화 등을 일정 부분 타협하는 식으로 조사를 마무리하는 경우도 일부 있다고 한다. 다만 상당수 트럼프 정부 인사들 사이에서 한국이 자국 테크 기업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것이 변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한편 그린오크스 등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근거해 우리 정부를 상대로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 소송을 추진하는 것은 계속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FTA상 우리의 권리는 영향을 받지 않고, 한국 정부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인 조치는 계속해서 독립적으로 진행된다”며 “미국 투자자와 기업이 국제 협정 아래 공정하고 차별 없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계속해서 수호할 것이고 이런 원칙이 입증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들은 지난 1월 쿠팡 개인 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혁신적인 미 경쟁 업체를 표적 삼아 파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과 법무부에 ISDS 중재 신청을 제기하겠다는 의향서를 발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