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 보유국’ 지위 인정과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를 조건으로 내걸어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시사한 가운데, 백악관은 26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어떤 전제 조건 없이 대화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백악관은 이날 미·북 대화 가능성과 관련한 본지 질의에 “대통령은 첫 임기 동안 김정은과 세 차례(싱가포르·베트남·판문점) 회담을 갖고 한반도를 안정시켰다”며 이같이 말했다. 워싱턴 DC를 방문 중인 정연두 외교부 외교전략본부장도 이날 특파원 간담회에서 미 국무부 차관, 동아태 차관보 등과 만나 “미국이 북한과의 전제 조건 없는 대화에 열려 있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아직 미·북 간에 대화를 위한 물밑 접촉은 없지만 3월 말~4월초 트럼프의 중국 방문을 계기로 미·북 대화가 급물살을 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김정은은 최근 진행된 9차 당대회에서 한국을 ‘철저한 적대국, 영원한 적’으로 규정한 반면 미국에 대해서는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하고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경우 “좋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한국은 ‘상종 못할 상대’라며 소통을 차단하면서도 미국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통미적남(通美敵南)’인 셈이다. 이에 대한 백악관의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하는 데 열려 있다”는 답변은 표면적으로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과 만날 수 있다는 트럼프 의지가 상당한 만큼 곧 있을 동북아 방문을 앞두고 톱다운(top down·하향식)으로 언제든 물꼬가 터질 수 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도 최근 “미래 북한의 어느 정부 관계자와도 만나 대화하고 입장을 경청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트럼프는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여러 차례 김정은을 만날 의사를 표명했다. 지난해 10월 트럼프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경주를 방문했을 때도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했고, 트럼프는 “이번엔 김정은을 만나지 못했지만 대화를 위해 다시 오겠다”고 했다. 김정은도 지난해 9월 말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트럼프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다만 현재까지 미·북 간에 대화를 위한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트럼프 정부가 ‘뉴욕 채널’ 등을 통해 의사를 타진했지만 북측의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대화에 열려 있다’는 입장이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겠다’는 수준까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했다. 북한은 미국이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대화 테이블에 나올 수 있다는 입장이다. 트럼프가 북한을 사실상의 핵 보유국을 의미하는 ‘핵 보유 세력(nuclear power)’이라 부른 적은 여러 차례 있지만, 미 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구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미국이 비핵화 정책까지 바꾸고 (북한에) 다른 대접을 해가며 북한과 만나겠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와 아산정책연구원은 26일 발간한 공동 보고서에서 “한미가 평양(북한)과의 회담이 있기 전 상호 북한 정책을 논의·조율할 수 있는 포럼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 당국자는 “우리 측은 페이스메이커로서 북·미 대화 조기 성사를 계속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미국 측에 대북 특사 파견이나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제재 해제 같은 아이디어를 꾸준히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