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 워싱턴 DC 연방 의회에서 2기 집권 후 첫 국정연설(State of The Union)을 가졌다. 미국과 이란 사이 전운 고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주년, 대법원의 상호 관세 위법 판결 후폭풍 등 현안 속에 이뤄져 세계의 시선이 쏠렸다. “지금이 미국의 황금기”라는 말로 시작한 연설은 역대 최장 시간인 108분 동안 이어졌다. 트럼프는 대외적으로 힘을 앞세운 군사·안보 정책으로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구축하고,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관세 중심의 통상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참전 용사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을 불러 깜짝 시상식을 열고, 강경한 이민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지지층 결속에도 주력했다.
◇“대법원 판결에도 관세는 그대로”
이번 국정연설은 연방대법원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에 근거한 상호 관세 부과에 위헌 판결을 내린 지 나흘 만에 열렸다. 트럼프는 연방 대법관들도 자리한 연설장에서 “나는 관세를 국가 안보 차원에서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활용했는데 대법원이 유감스러운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좋은 소식은 거의 모든 국가와 기업이 이미 체결한 협정 유지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통상 협상에서 관세를 무기로 삼겠다는 방침을 고수한 것이다. 그는 “기존보다 더 강력한 대체 수단들이 준비돼 있다”면서 “새 조치가 이전보다 다소 복잡해질 수 있지만 오히려 더 강력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법원 판결 직후 연쇄 발표한 15%의 글로벌 관세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관세 무기’ 사용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의 평균 관세는 우리보다 4배가 더 높은데 우리는 군사적으로, 그리고 아주 많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도와주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도 했다. 앞서 여러 차례 공세적 관세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대표 사례로 한국을 언급한 바 있는데 이날 역시 한국이 ‘소환’된 것이다.
◇“이란, 미국 본토 겨냥 미사일 개발... 핵무기 보유 허용 절대 불가”
트럼프는 이란 문제에 대해서는 강력한 압박을 이어갔다. “우리는 그들과 협상을 하고 있는데, 아직 ‘핵무기를 절대 보유하지 않겠다’는 비밀 단어를 듣지 못했다”며 “이란은 핵무기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어 “이란이 이미 유럽과 해외 미군 기지를 위협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곧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란 반정부 시위 희생자 숫자를 3만2000명으로 소개하면서 “외교로 해결하는 쪽을 선호하지만, 결코 세계 최대의 테러 후원국이 핵을 보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군사력 사용 가능성도 시사한 것이다.
트럼프의 국정 연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주년이 되는 날 진행됐다. 트럼프는 자신이 2기 임기 시작 후 종전·휴전에 관여한 8개 국제 분쟁을 일일이 언급한 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자신이 종전을 위해 노력하는 아홉 번째 전쟁으로 소개했다. 미국과 유럽 간 대서양 동맹을 분열시키고 있는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에 대해서는 “우리는 국제 안보를 위해 그린란드가 필요하다. 주민 여러분을 부유하고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며 미국 땅으로 삼겠다는 뜻을 재차 강조했다. 트럼프의 2기 첫 의회 연설이었던 지난해 3월 상·하원 합동 연설에 이어 올해 국정연설에서도 북한 핵과 중국 안보 위협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범죄 피해자 가족 소개하며 이민 정책 정당성 강조
트럼프는 지지층과 반대층의 극심한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의 국내 정책에 대한 정당성을 강조하는 데도 주력했다. 특히 민주당·진보 진영이 반발하는 체포·검거 위주의 이민 단속 정책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불법 이민자 범죄 희생자 가족을 대거 의회로 불렀다.
2년 전 불법 이민자가 운전하는 트럭에 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곱 살 소녀 딜라일라 콜먼과 그의 가족을 불러일으켜 세우고 “모든 주에서 불법 이민자에 대한 상용 트럭 면허 발급을 금지하는 ‘딜라일라 법’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열여섯 살 때 불법 이민자에게 살해당한 소녀 리즈베스 메디나,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노숙자에게 살해당한 이리나 자루츠카, 아프가니스탄 출신 정착민에게 살해당한 웨스트버지니아 여성 주방위군 사라 베크스트롬의 유족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조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 시절의 느슨한 이민·치안 정책으로 이 사건들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말리아계 이주민들이 다수 정착한 미네소타주에서 복지 부정 의혹이 불거진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들을 “소말리아 해적 떼”라고 부르고 “J D 밴스 부통령이 ‘사기와의 전쟁’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참전 용사에게 깜짝 시상
연설의 처음과 끝부분에는 미국인의 단합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배치됐다. 트럼프는 연설 초반 밀라노 코르티나 올림픽에서 캐나다를 물리치고 46년 만에 금메달을 딴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을 일으켜 세웠다. 금메달을 건 선수들이 일어났을 때는 공화당 의원뿐 아니라 민주당 의원들도 기립 박수를 보냈다. 트럼프는 수훈갑인 골리 코너 헬러벅에게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하겠다고 밝혔다.
연설의 마지막은 두 파일럿에 대한 최고 무공 훈장인 명예 훈장 수여로 마무리됐다. 트럼프는 우선 지난 1월 3일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생포·압송 작전에서 치누크 헬기를 조종한 육군 파일럿 에릭 슬로버 준위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슬로버 준위는 당시 총탄 네 발을 맞는 중상을 입고도 무사히 헬기를 착륙시켜 공을 세웠다고 트럼프는 전했다. 사후 수여자가 다수인 명예 훈장을 현직 군인이 전공(戰功)을 세운 지 50여 일 만에 수상하는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다. 트럼프는 6·25 전쟁 영웅 로이스 윌리엄스(101) 예비역 해군 대령에게도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홀로 소련 미그기 4대를 격추하며 맹활약했지만 오랜 기간 비밀에 부쳐야 했다는 속사정도 트럼프가 직접 설명했다. 배우자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가 훈장을 걸었다.
이날 트럼프가 속한 공화당 의원들이 연설 도중 여러 차례 기립박수를 한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자리에 앉아 침묵을 지키거나 아예 연설장에 오지 않았다. 민주당 여성의원들은 트럼프가 투표 유권자 등록 절차를 대폭 강화한 ‘미국 구원법(Save America Act)’을 추진하는데 반대하는 의미로 흰 옷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