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DOJ)의 반독점국 수장인 게일 슬레이터 차관는 12일 전격 사임했다. 연방거래위원회(FTC) 등에서 근무한 반독점·공정 거래 분야 베테랑 변호사 출신인 그가 지난해 3월 취임한 지 약 11개월 만으로, 팸 본디 법무장관 측과의 권한 충돌이 격화된 끝에 사실상 경질된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한 소식통을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슬레이터에 대한 해임 결정을 지지했다”고 전했다. 법무부 반독점국은 대기업 결합 심사와 독과점 소송 등을 총괄하는 핵심 기관 중 하나다.
슬레이터는 이날 X(옛 트위터)에서 “오늘 반독점 담당 차관보직을 떠나게 돼 깊은 슬픔과 동시에 변함없는 희망을 느낀다”며 자신의 사임 소식을 알렸다. 슬레이터는 J D 밴스 부통령이 상원의원으로 있을 때 경제정책 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지난해 공화·민주 양당의 초당적인 지지 아래 반독점국 수장에 임명됐는데, “빅테크가 지나친 권력을 행사한다고 믿는다”는 밴스에 보조를 맞춰 경쟁 정책 집행에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댈 것으로 예상됐다. 밴스는 실리콘밸리의 거물들과 가깝고 정치적 후원도 받는 관계지만, 일부 테크 기업이 보수 성향 시민들의 발언을 ‘검열’하고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통제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슬레이터는 차관보 취임 이후 직속 상사인 본디와 주요 사건마다 이견을 보였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전했다. 슬레이터는 대기업 결합에 대한 강경 집행과 빅테크 규제를 강조해 왔는데, 백악관과 일부 고위 인사들은 산업 정책이나 외교·안보적 고려 등을 반영한 유연한 접근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워싱턴 DC에서 활동하며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요 로비스트들의 입김도 상당히 작용했다. 특히 휴렛패커드엔터프라이즈(HPE)의 140억 달러(약 20조1900억원)짜리 주니퍼네트웍스 인수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이 불거진 것으로 전해졌다. 신중한 접근을 주문한 슬레이터와 달리 정보·안보 당국은 화웨이 같은 중국 업체와의 경쟁을 고려해 전략적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업계에서는 슬레이터 낙마를 계기로 정치적 중립성과 집행의 독립성 등이 존중됐던 관행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미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반독점 정책 집행에 정책적 우선순위, 정책적 고려가 상당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척 그레슬리 공화당 상원의원은 “탁월한 업무 능력을 발휘한 슬레이터가 법무부를 떠나게 돼 유감”이라고 했다. 슬레이터와 주요 사안을 놓고 갈등을 빚었던 본디는 성명에서 “소비자 보호, 경제적 기회 확대를 위해 노력하는 반독점국을 위해 헌신한 슬레이터에게 법무부를 대표해 감사드린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