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미국 워싱턴 DC 의회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유력 인사들과의 유착설이 제기된 미성년자 성 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 관련 문건(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두고 하원 법사위원회 의원들과 팸 본디 법무장관의 설전이 5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트럼프의 대표적인 충성파 인사인 본디는 엡스타인 파일의 부실한 공개와 지연 등을 두고 문제를 제기하는 의원에게 거친 말로 받아쳤다. 정쟁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와 선을 지켜온 미국 정치의 미덕이 사라지고 격한 말싸움이 ‘뉴노멀’이 된 트럼프 2기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왔다.
트럼프는 지난해 11월 문건을 공개토록 하는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에 서명하며 정면 돌파에 나섰다. 이에 법무부가 파일 공개를 시작했지만 아직까지 트럼프에 대한 결정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날 민주당 의원들은 법무부가 엡스타인 문건 공개 과정에서 일부 피해자의 민감한 개인 정보를 노출한 것을 문제 삼았다.
프라밀라 자야팔 민주당 의원은 방청석의 피해자들에게 일어나 달라고 요청한 뒤 본디에게 피해자들을 향해 돌아서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본디는 “정치 쇼에 맞춰 저급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했다.
민주당 법사위 간사 제이미 래스킨 의원과의 설전은 더욱 거칠었다. 래스킨은 “법무장관으로서 당신은 가해자 편에 서서 피해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며 “오늘 당신 뒤에 앉아 있는 여성들 같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본디는 “그 괴물(엡스타인)로 인한 어떤 피해자든 그들이 겪은 일에 대해 깊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어떠한 범죄 혐의 제기도 엄중히 받아들여 수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로스쿨 헌법학 교수 출신인 래스킨이 엡스타인 사건 가해자들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점을 파고들자 본디는 그를 향해 “한물간 낙오자 변호사, 심지어 변호사도 못 되는 자”라고 했다.
트럼프의 엡스타인 연루 의혹을 제기한 테드 류 의원에 대해서는 “당신의 지역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에나 집중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류 의원의 지역구가 민주당의 지지 기반인 캘리포니아라는 점까지 싸잡아 저격한 것이다.
본디의 공격은 민주당 의원에게만 겨냥하지 않았다. 공화당 내 반(反)트럼프 성향인 토머스 매시 의원이 피해자 이름 노출을 강도 높게 문제 삼자 본디는 “실패한 정치인” “트럼프 광적 집착 증후군” 같은 표현을 사용해 가며 응수했다. 본디는 “당신의 발언 시간은 끝났다”며 질문하는 의원들 말을 끊고, 때론 고성도 질러 공화당 소속인 위원장이 제지에 나설 정도로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본디는 “대통령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는데도 대통령을 여기 앉아서 공격하는데 그걸 용납할 수 없다”며 트럼프를 엄호했다. 주가, 경제 통계 등을 인용해 트럼프의 치적을 열거하며 회의 목적과 무관한 발언도 했다. 플로리다주 법무장관 출신인 본디는 당초 트럼프 2기 초대 법무장관으로 지명된 맷 게이츠 전 하원의원이 미성년자와의 성 추문으로 낙마하자 대타로 지명돼 입각했다.
트럼프 2기 들어서 정부 각료와 의원들이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자리가 가시 돋친 언쟁의 장으로 바뀌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지난 4일 하원 청문회에서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관세 정책 등을 놓고 민주당 의원들과 충돌했다. 한 민주당 의원이 “(베선트의) 입을 좀 다물게 할 수 없냐”고 말할 정도로 분위기가 격앙됐다. 베선트는 “질문 자체가 진지해야 한다” “품위를 유지해달라”며 민주당 의원들을 비판했다.
지난해 9월에는 또 다른 트럼프 충성파 캐시 파텔 연방수사국(FBI) 국장이 상원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 “허위 정보와 폭언은 이 나라를 하나로 모으지 못한다” “당신은 이 나라의 부끄러운 존재” “상원에 앉아 있는 가장 큰 사기꾼”이라 막말을 퍼부었다.
트럼프 정부 인사들이 의회에서 거침없이 발언하는 것은 공화당이 행정부 권력은 물론 상·하원 다수당 지위를 모두 차지하고 있어 견제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환경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