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국만 특정해 관세를 무역합의 이전 수준으로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26일 사전 예고 없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정확한 배경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유럽연합(EU) 등 주요국에 비해 한국의 합의 이행 절차가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인교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가진 조치라기보다, 한국의 합의 이행을 압박하기 위한 전략적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 의지를 갖고 관세를 되돌린다기보다는, 실리를 챙기고 빠지려는 트럼프 특유의 ‘거래 기술’이라는 얘기다. 트럼프의 이날 발표에도 관세 부과 시점 등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국 속도에 대한 불만 반영”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조시 립스키 국제경제 석좌는 이날 가디언에 트럼프의 이번 조치가 “한국의 속도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것”이라 했다. 한국 국회에서 ‘대미투자특별법’에 대한 절차가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지난 16일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현재 외환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적어도 올해 안에는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했다. 한 통상 전문가는 “환율 상황을 핑계삼아 11월 미국 중간 선거 때까지 우리 정부가 버티려는 것으로 비쳤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의 미온적 태도가 트럼프의 ‘조급증’을 자극했다는 해석이다.
반면 지난해 7월 관세 협의를 타결한 일본은 미국과 불협화음 없이 5500억 달러(약 800조원)의 대미 투자 계획을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오는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미일 정상회담에서 1호 투자 프로젝트를 발표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최대 250억 달러 규모인 데이터센터 인프라 프로젝트 등 구체적인 프로젝트 내용까지 거론된다. 일본은 우리와 달리 별도의 입법·비준 절차나 기관 설립이 필요없다.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이 발행하는 달러 표시 채권, 외환 보유액(약 1조3500억 달러) 일부 전환 등 기존 법·제도 안에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미 투자 책임자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산업상은 지난 21일 다보스포럼에서 러트닉 미 상무장관, 크리스 라이트 미 에너지부 장관 등과 만나 대미 투자 프로젝트를 협의했다. 러트닉은 자신의 X(옛 트위터)에 인증 사진을 올리며 “우리는 미국 내 발전 시설 확충에 집중하고 있고, 양국 간 무역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다”고 했다.
유럽연합(EU)도 지난해 7월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타결한 무역 합의에 대한 승인을 앞두고 있다. 입법 기관인 유럽의회가 26~27일 표결로 이번 합의에 대한 공식 입장을 정할 예정이었지만, 트럼프가 덴마크 자치령인 그린란드에 대한 소유 의지를 굽히지 않으면서 해당 일정을 보류했다. 미국과 유럽이 그린란드에 관한 후속 협상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조만간 표결 일정이 다시 잡힐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것이 트럼프로 하여금 다른 나라에도 조속한 합의 이행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갖게 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관세 위헌판결 영향 가능성도
트럼프가 무역확장법이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동원해 상호관세를 부과하는 행위에 대한 미 연방대법원의 위헌(違憲) 여부 판결이 임박했는데, 트럼프가 이에 앞서 한국의 대미 투자를 못 박으려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대법원 선고로 상호관세의 법적 효력이 상실되기 전에 한국의 투자를 확정 지으려는 조바심이 났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관세가 국가 안보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해 왔다.
블룸버그는 트럼프의 발언이 “동맹국을 압박하면서 무역 긴장을 고조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분석했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책연구소 부회장은 “한국 정부가 (국회 입법을 거치지 않고) 행정부 승인만으로 할 수 있는 무역 합의의 일부를 이행한다면 현재의 위협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