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13일 워싱턴 DC에서 만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산업부

온라인플랫폼법 등 미국 빅테크 기업을 겨냥한 우리 정부의 규제 입법 움직임을 놓고 한미 간 이견이 커지면서 통상 갈등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경쟁 정책 및 디지털·정보 기술(IT) 업계 전문가들은 15일 “믿기 어렵겠지만 트럼프 정부는 한국의 디지털 비(非)관세 장벽 문제를 유럽보다도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며 “미국 기업이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서 차별받지 않을 것을 명시한 팩트시트(Fact Sheet·공동 설명 자료)가 지켜지지 않을 경우 한국의 관세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이 “약속을 저버릴 경우 무역법 301조 조사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그 결과 지난한 과정을 거친 한미 관세 협상이 다시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역법 301조(Trade Act of 1974)는 미국이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응하는 법적 근거 중 하나로, 디지털 플랫폼 차별 규제 같은 불합리한 외국 정부 조치에 대해 조사를 거쳐 관세 부과, 수입 제한 같은 광범위한 보복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날 워싱턴 DC에서 진행된 간담회에는 나이절 코리 아시아정책연구소(NBR) 비상근 펠로, 샨커 싱엄 컴페테레재단 회장, 모건 리드 미국 앱협회 대표, 조셉 코니글리오 정보기술혁신재단(ITIF) 시니어 디렉터가 패널로 참석했고 ‘채텀하우스 룰’에 따라 진행됐다. 이들은 “유럽의 디지털시장법(DMA) 같은 방식의 규제와 대통령이 인력 충원을 지시한 강력한 공정거래위원회(KFTC)와의 결합은 미국 기업들이 정말로 원하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이런 목소리는 자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미 조야(朝野)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이날 간담회는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런 미국의 우려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 12일부터 워싱턴 DC를 방문해 그리어 대표, 상·하원 의원, 싱크탱크 인사 등을 두루 만나고 있는 가운데 열렸다. 한 인사는 “경쟁 당국이 무언가를 한다고 해서 시장이 반드시 경쟁적이란 의미는 아니다”라며 “때로는 가장 강력한 주체로 오히려 경쟁을 저해하고 왜곡을 초래하는데 한국에서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업이 크면 나쁜 것이고 작고 분할된 시장이 바람직하다’는 잘못된 가정에 기반하고 있고, 종종 소비자 복지와는 무관하게 이를 해치는 방식으로 경쟁 정책을 집행한다”고 했다. 이 인사는 “잘못된 경쟁 정책은 우리 기업과 플랫폼, 미국 무역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미국 경제에도 피해를 준다”며 “한미 모두에게 손실이 될 수 있어 미국이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14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경쟁 정책, 디지털·정보 기술(IT) 업계 관계자 간담회에서 패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 나이절 코리 아시아정책연구소(NBR) 비상근 펠로, 샨커 싱엄 컴페테레재단 회장, 모건 리드 미국 앱협회 대표, 조셉 코니글리오 정보기술혁신재단(ITIF) 시니어 디렉터가 패널로 참석했고 이날 행사는 '채텀하우스 룰'에 따라 진행됐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미 조야에서는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온플법이 유럽의 DMA를 모델로 하고 있고 자국 기업에 해가 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미국은 유럽연합(EU)이 구글·메타 등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막기 위해 도입한 DMA, 디지털서비스법(DSA) 등을 문제 삼아 일부 우방국 인사들의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초강수까지 뒀다. 또 다른 인사는 플랫폼법과 함께 최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언급하며 “공화·민주 양당의 의원들이 한국의 디지털 정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고 트럼프 정부의 관심도 분명히 존재한다”며 “한국의 당국자들이 합의 도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지난해 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한미는 지난해 12월 팩트시트 도출을 기념하고 조선 협력 의지를 다지는 세리머니 성격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를 열기로 돼 있었지만, 디지털 규제에 대한 이견 때문에 취소됐다는 미국 언론 보도(폴리티코)가 있었다.

이 인사는 낮은 조사 개시 기준, 영장이 없어도 비슷한 효과를 내는 ‘임의 제출’ 방식, 불필요한 급습 같은 공정위의 조사 관행을 문제 삼았는데 “한국 내 사업을 영위하는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변호사들이 ‘우리 일기장이라도 읽었냐’라고 농담을 할 정도로 업계 전반에 널리 공유되는 불만이 팽배하다”며 “새로운 법안 제안에 (미국에서) 이처럼 공격적인 반응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이미 공정위가 기존 입법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매우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정위 규제 아래 이미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데, (플랫폼법에 따라) 새롭고 광범위하며 모호한 권한이 부여된다면 기업 환경이 지금 보다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익명의 제보나 경쟁사 고발로도 조사가 시작될 수 있다” “‘조사 대상이 아니면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라 말할 정도로 방어적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기업 의견도 소개됐다.

미 인사는 “한국은 매우 강력하고 탄탄한 기업가 정신 문화를 지니고 있지만 문제는 종종 규제 문화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024년 3월 세계 최초로 포괄적 인공지능(AI) 규제 법안을 통과시킨 EU 사례를 거론하며 “구조도, 의미도, 확실성도 갖추지 못한 법안을 먼저 통과시키고 내용은 나중에 정하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말할 수밖에 없다”며 “이런 유럽의 규제는 중소기업들을 짓밟고 미국 경제와 엄청난 격차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도 이런 규제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열망을 목격했다”며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중소기업들이 시장에 안착하는 것을 규제라는 불행한 유리 천장이 방해하고 있다”고 했다.

☞ 채텀하우스 룰

채텀하우스는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의 별칭이다. 세계 최정상급 외교·안보 분야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에선 1927년부터 전문가들의 자유롭고 속 깊은 토론을 위해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비밀에 부치고 있다. 이 규칙을 ‘채텀하우스 룰’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