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뉴시스·산업부

미국 정부가 한국이 디지털 관련 규제를 추진하는 것을 문제 삼아 양국간 고위급 무역회담을 취소했다고 미 언론이 20일 보도했다. 정부·여당이 추진 중인 온라인 플랫폼 규율을 위한 입법 시도가 추후 한·미 무역 갈등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18일(현지 시각) 예정돼 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 회의를 취소했다. 공동위는 2012년 한·미 FTA 체결 뒤 만들어진 양자 기구로, FTA 핵심인 무관세 약속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 정책 이후 사실상 무력화됐지만 비관세 장벽을 논의하는 틀로서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 뒤 처음 마련된 이번 회의에서는 양국 간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의 무역 분야 합의 후속 조치 이행 방안이 논의될 예정이었다. USTR 대표와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만나는 한·미 FTA 공동위는 1년에 한 번 양국을 오가며 열리는데, 폴리티코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취소사유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차별적이라 판단하는 디지털 규제를 한국이 추진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폴리티코는 또 “미 정부는 한국이 디지털 분야를 비롯한 우선 과제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는 미 정부·의회가 꾸준히 비판하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법(온플법)’ 등에 대한 입법 추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빅테크의 독과점 횡포 차단이 목적인 해당 입법은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취소가 아니라 한미 간 사전 의제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번 회의를 ‘연기’하기로 했다는 입장이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내년 초 정도로 일정을 논의하며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건설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한 소식통은 폴리티코에 “회의 연기는 양측 모두 회의 한 번으로 이런 차이를 해결하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한 것을 반영한다”고 했다

이번 회의 취소는 디지털 장벽 문제가 한·미 통상 마찰의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구글·아마존·넷플릭스 등 자국 빅테크(거대 기술기업)들이 한국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부당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조인트 팩트시트에 “한미는 망 사용료, 온라인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문구가 들어간 것도 이때문이다. 이 문구에 대해 미국 측은 ‘온플법을 도입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한국은 ‘차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우리 정부는 지속적으로 이같은 내용을 설명하고 있지만, 지난 16일 미 하원 법사위 반독점 소위 청문회에서는 일부 의원이 “한국 정부가 예측할 수 없는 규제 집행 등 부적절한 정책으로 10년에 걸쳐 미국 경제에 5250억 달러(약 787조5000억원)의 비용을 발생시켰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빅테크 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미 행정부·의회 고위급을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펼치고 있어 추후 ‘디지털 장벽 해제’ 구호를 고리로 한 미국의 압박이 커질 가능성도 크다. 일각에선 미 정부가 미국 상장 기업인 쿠팡 이슈까지 문제삼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소식통은 “미국의 일부 리더십은 똑같이 앞서 개인 정보 유출이 문제가 된 다른 한국 기업과 비교해 (쿠팡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도 갖고 있다”고 했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워싱턴 DC 대형 로펌 변호사 출신으로 이 분야에 대한 문제 의식이 상당한데,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의 디지털 규제 관련 “미국이 막대한 무역 적자를 감수해가며 한국과의 경제 관계를 확대했는데, 그 대가로 받아드는 것이 우리 나라 회사에 대한 가혹한 차별이라면 이건 끔찍한 그림”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에도 한국의 디지털 규제가 철회되지 않을 경우 무역법 301조에 따른 조사 착수 가능성까지 시사한 바 있다.

USTR은 최근 유럽연합(EU)이 디지털서비스법(DSA)에 근거해 일론 머스크의 X(옛 트위터)에 1억2000만 유로(약 205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메타·구글·애플 등에 대한 조사에 나서자, ‘상응 조치’를 경고하며 “EU 스타일의 전략을 추구하는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본지는 USTR에 이번 한미FTA 공동위가 연기 또는 취소된 배경을 물었으나 답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