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한국이 디지털 관련 규제를 추진하는 것을 문제 삼아 18일 예정됐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를 취소했다고 폴리티코가 19일 보도했다. 이번 회의는 한미 관세 협상의 후속 조치 성격이 있었는데, 이 매체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차별적이라 판단하는 디지털 제안을 한국이 추진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정부 고위급은 자국 빅테크 기업이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한국의 경쟁 당국 등으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강한데, 무역대표부(USTR) 등이 꾸준히 시정을 요구해 온 ‘디지털 장벽’이 추후 한미 무역 갈등의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를 수 있다. 우리 정부는 내년 초 회의 개최를 위해 “일정을 건설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폴리티코는 이날 소식통을 인용해 “미 정부는 한국이 디지털 분야를 비롯한 우선 과제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이는 미 정부·의회가 꾸준히 저격하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 독점 금지법(OPMA)’ 등에 대한 입법 추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USTR 대표와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만나는 한미FTA 공동위는 1년에 한 번 양국을 오가며 열리는데, 한 소식통은 “양측 모두 회의 한 번으로 이런 차이를 해결하기에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고 인정한 것을 반영한다”고 했다. 우리 정부는 취소가 아니라 한미 간 사전 의제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번 회의를 ‘연기’하기로 했다는 입장이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7일 “내년 초 정도로 일정을 논의하며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건설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한미가 지난달 팩트시트 발표로 관세 협상은 일단락 지었지만, 미완(未完)의 과제인 디지털 장벽 문제가 새로운 뇌관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우리 경쟁 당국 등이 미국 빅테크 기업을 규제하고 일부 무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한 미 고위급의 거부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팩트시트에도 “한미는 망 사용료, 온라인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과 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들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고 돼 있다. 구글·아마존·넷플릭스 등 국내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미 빅테크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사안들로 어느 하나 한미가 쉽게 협의에 이르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지난 16일 하원 법사위 반독점 소위 청문회에서는 한국 정부가 “예측할 수 없는 규제 집행 등 부적절한 정책으로 10년에 걸쳐 미국 경제에 5250억 달러(약 787조5000억원)의 비용을 발생시켰다”는 얘기도 나왔다.
빅테크 기업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정부·의회 고위급을 상대로도 광범위한 로비를 펼치고 있어 추후 ‘디지털 장벽 해제’ 구호를 고리로 한 미국의 압박이 커질 가능성도 크다. 특히 델라웨어주(州)에 등록된 ‘쿠팡 INC’가 모회사인 쿠팡 주식회사(한국 법인)가 개인 정보 유출 사태로 국내에서 영업 정지 가능성까지 제기된 가운데, 한 소식통은 “미국의 일부 리더십은 똑같이 앞서 개인 정보 유출이 문제가 된 다른 한국 기업과 비교해 (쿠팡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도 갖고 있다”고 했다. 미 조야(朝野)에선 영장 없는 자료 제출 방식인 공정위의 ‘임의 제출’, 낮은 조사 개시 기준,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현장 조사 등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공정위의 공격적인 규제 집행이 미 기술 기업들을 부당하게 제한하고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는 워싱턴 DC 대형 로펌 변호사 출신으로 이 분야에 대한 문제 의식이 상당한데, 지난해 본지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의 디지털 규제 관련 “미국이 막대한 무역 적자를 감수해가며 한국과의 경제 관계를 확대했는데, 그 반대 급부로 받아드는 것이 우리 나라 회사에 대한 가혹한 차별이라면 이건 끔찍한 그림”이라고 했다. USTR은 최근 유럽연합(EU)이 디지털서비스법(DSA)에 근거해 일론 머스크의 X(옛 트위터)에 1억2000만 유로(약 205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메타·구글·애플 등에 대한 조사에 나서자 ‘상응 조치’를 경고하며 “EU 스타일의 전략을 추구하는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라고 했다. 본지는 USTR에 이번 한미FTA 공동위가 연기 또는 취소된 배경을 물었으나 답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