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년 상반기 중국 방문을 계기로 북한 김정은과 직접 접촉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우리 정부가 이른바 ‘코리아 패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대미(對美) 협의에 나선 가운데, 대북 정책의 주도권을 놓고 외교·안보 부처인 외교부와 통일부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흐르고 있다. 전직 통일부 장관 6명이 “외교부는 전문성이 없고 남북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 성명을 낸 데 이어 통일부가 주한 외교단을 상대로 별도의 설명회를 갖는 등 좀처럼 보기 드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6일 워싱턴 DC를 찾은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논의가 있어 정리됐고, 그대로 이행이 됐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다”며 ‘원 보이스’가 부재(不在)한 현 상황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1969년 3월 국토통일원으로 출발해 1998년 현재 모습을 갖춘 통일부는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특수 부처다. 대북 정책의 주무 부처이지만 미국에는 통일부에 딱 들어맞는 카운터파트가 없어 백악관·국무부 당국자들은 어느 부서에서 누가 어떤 방식으로 통일부를 상대할지를 놓고 정권마다 적지 않은 고민을 거듭했다. 이미 오래전에 국무부와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현 외교전략정보본부) 간에 대화 채널이 개설돼 있어 북한 비핵화, 미·북 대화,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 협상 같은 핵심 의제 대부분을 다뤘기 때문이다. 역대 통일부 장관마다 취임 후 의욕을 갖고 방미(訪美)를 추진했지만 국무장관이나 백악관 고위 관계자 등과의 면담이 잡히지 않아 방문 계획이 보류됐던 적도 적지 않다. 미국이나 일본의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방한하면 서울에서 통일부 고위급을 예방했지만, 그때마다 외교부의 견제가 적지 않게 작용했던 것도 사실이다. 워싱턴 DC의 주미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통일부 공무원은 1명에 불과하다. 다만 정동영 장관의 경우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과 함께 통일,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하는 NSC 상임위원장직을 겸해 미국에서 받는 대우가 달랐다.
통일부 특성상 대북 대화를 중시할 수밖에 없지만, 때로는 무리한 대미·대북 협의 시도가 동맹인 미국과의 트러블로 이어지기도 했다. 트럼프 정부 1기 당시 문재인 정부는 싱가포르, 베트남 하노이 미·북 회담이 잇달아 좌절된 후에도 어떻게든 대북 인도 지원 등을 통해 대화의 ‘불씨’를 이어가려 했으나, 유엔 대북 제재 위반을 우려하는 미국의 반대에 번번이 가로막혔다. 당시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 특보 같은 고위급이 나서서 한미 워킹그룹에 대한 기능 재조정을 요구했고,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우리 스스로 독자적으로 판단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일관된 생각”이라며 인도적 교류 영역은 미국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거리에선 정권의 우군(友軍)인 민노총이 ‘워킹그룹 해체’ 구호를 집요하게 외쳐 이를 관철시켰다. 동맹 간에 이견이 있는 듯한 모습은 한미 관계에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했는데 트럼프 정부 1기 때 미·북 대화에 관여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은 회고록·인터뷰 등을 통해 일관되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바 있다. 바이든 정부에서 대북고위관리를 지낸 정 박 전 국무부 부차관보는 올해 4월 본지와 만나 “트럼프가 문재인 대통령과 평탄지 않은(bumpy) 관계를 가졌던 것은 맞다”고 했었다.
통일부가 그나마 미 조야(朝野)에서 환영받았던 때는 남북 간에 북한 인권 의제가 활발하게 돌아가던 시기다. 2023년 8월 한·미·일 정상이 발표한 ‘캠프 데이비드’ 원칙에 납북자, 억류자 및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의 즉각적인 해결이 처음 명시됐는데 이후 정부·민간 할 것 없이 각계 각급에서 한미 간 협의에 탄력이 붙었다. 한미가 대북 정보 유입 등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두 차례 미국을 방문해 커트 캠벨 당시 부장관과 회동을 가졌고, 북한 인권 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한 ‘북한인권국제대화’ 행사에는 홍보 대사인 배우 유지태씨도 참석해 미 조야에서 적지 않은 화제가 됐다. 다만 현재는 한미 양국에서 북한인권특사가 공석(空席)이고, 트럼프와 이재명 대통령 모두 북한 인권 문제 공론화보다는 대북 대화에 방점을 두고 있어 한미 간 협의가 당분간 탄력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김건 국민의힘 의원은 “한미 간 협의는 외교부가 주도하고 통일부가 관련 부처로 지원하며 한미 간 입장을 조율해 낼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며 “정 장관이 지난 과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혼자만의 돈키호테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풍차를 향해 달리는 돈키호테와 다를 바 없다. 분열과 자중지란을 멈춰야 한다”고 했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권영세 의원도 “저도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지만 통일부가 대북 문제의 모든 면을 주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대북 제재와 북핵 문제 같은 국제적 측면의 상당부분은 외교부, 남북 문제의 안보·군사적 측면은 국방부가 담당하는 것이 맞는다. 아무리 정치인 장관이라 하더라도 ‘튀기 위해’ 무리하거나 팀플레이를 해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