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공개된 미국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군사 분야 최상위 지침인 ‘국가안보전략(NSS)’에는 과거와 달리 북한이 언급되지 않아 핵·미사일 문제가 미국의 정책적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본지는 이와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에서 북핵 업무를 맡았던 미라 랩-후퍼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장과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에게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들어봤다.
◇ 랩-후퍼 “북핵 빠진 NSS, 평양 오판 부를수도”
미라 랩-후퍼 전 국장은 8일 화상 인터뷰에서 “바이든 정부 당시 한미는 북한의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 워싱턴 선언, 핵협의그룹(NCG)을 통해 확장억제(핵우산)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며 “지금은 미국이 한반도에 확장억제를 투사하고 한국과 발을 맞춰 함께 서겠다는 의지의 강도가 훨씬 불분명해졌다”고 했다. 랩-후퍼는 NSS가 “실제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얼마나 바꿀지는 아직 알 수 없다”면서도 “북핵 문제가 NSS에서 누락됐고, (미국이) 확장억제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평양의 잠재적 오판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했다.
랩-후퍼는 “김정은이 트럼프와 대화는 할 수 있지만 의미 있는 정책적 양보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북한은 고립된 국가지만 러시아의 지원 덕분에 최근 10년 동안 가장 덜 고립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러시아가 국제 사회가 10년 넘게 구축한 대북 제재 레짐을 크게 훼손했기 때문에 김정은이 비핵화와 관련해 중대한 제안을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국내 일각에서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한미연합훈련을 잠정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가운데, 랩-후퍼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대북 외교를 하겠다며 안보 분야에서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랩-후퍼는 트럼프가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건조를 승인한 원자력 추진 잠수함과 관련해 “개인적으로는 한국이 직면한 북한의 위협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인지는 의문”이라며 “미사일·공중 방어, 드론 등 북한이 수행하는 여러 작전에 명확히 대처할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그는 “원잠 건조 자체가 상당히 복잡한 과제고 실제 운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어떻게 관련 능력을 확보할지는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이 프로젝트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 빅터 차 “김정은과의 대화 걸림돌 제거한 것”
빅터 차 한국 석좌는 9일 본지 통화에서 “트럼프는 여전히 북한 비핵화가 목표라고 말은 하겠지만 그걸 이유로 김정은과의 대화 기회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내년 4월 중국을 방문할 때 비핵화 문제가 대화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임을 (김정은에게) 분명히 밝힌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김정은과 만나기만 해도 만족할 것”이라고 했다.
차 석좌는 바이든 정부 때 국방정책 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NSS를 검토한 경력이 있다. 그는 “트럼프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라며 “이번 NSS에는 트럼프의 발언, 사고방식이 매우 강하게 반영됐다. 미국에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을 상당히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특히 NSS는 ‘오랜 분쟁의 종식과 새로운 우정의 형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차 석좌는 “이 부분을 가장 흥미롭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며 “북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려는 트럼프는 평화협정을 맺어 6·25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 성과를 중국에 대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할 수 있다”고 했다.
차 석좌는 NSS에 제1도련선(일본 규슈 남단부터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에서의 중국 견제가 강조돼 있는 것과 관련, “그럼에도 트럼프의 관심사는 중국과의 무역 재조정, 미국에 이익이 되는 중국과의 비즈니스 거래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규칙 기반 국제 질서 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대부분이 해상 운송로 개방, 상업 활동 등 오로지 상업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NSS에서 유럽 국가들을 ‘쇠락하는 국가들’이라며 강하게 비판한 것에 대해서는 “유럽이 단순히 유럽 방어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는 결국 아시아 안보에도 별로 좋지 않은 신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