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100만달러(약 14억7000만원)를 내면 최단 기간에 영주권을 부여하는 일명 ‘트럼프 골드 카드(Trump Gold Card)’ 신청 접수를 10일(현지 시각)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고액 자산가를 유치하겠다며 예고해 온 신규 이민 프로그램이 현실화된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10일 개설한 '트럼프 골드 카드' 신청 홈페이지 화면 캡쳐.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에 “미국 정부의 트럼프 골드 카드가 오늘 출시됐다”며 직접 홍보에 나섰다. 그는 “이 카드는 검증된 지원자에게 시민권 취득의 길을 열어주는 프로그램이자 위대한 미국 기업들이 인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며 신청 사이트 링크를 공유했다. 사이트에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초상화가 그려진 황금색 카드 도안이 내걸렸다.

골드 카드의 핵심은 ‘속도’와 ‘현금’이다. 신청자가 1만5000달러(약 2200만원)의 행정 수수료를 내고 국토안보부(DHS)의 신원 조회를 통과한 뒤, 100만달러를 기부금으로 납부하면 즉시 영주권 수속이 진행된다. 통상 수년이 걸리던 심사 기간이 몇 주 단위로 단축되고 신청자는 곧바로 EB-1 또는 EB-2 비자 지위를 얻는다. 500만달러(약 73억5000만원)를 내는 상위 등급인 ‘플래티넘 카드’는 영주권 대신 연간 270일 체류를 허용하고, 미국 밖에서 번 소득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제하는 혜택을 담았다.

이번 제도는 기존 투자이민 비자인 ‘EB-5’를 사실상 폐지하고 대체하는 조치다. EB-5는 외국인이 미국 내 낙후 지역 개발 사업 등에 일정 금액(80만~105만달러)을 투자하고 10명 이상의 고용 창출을 입증해야 영주권을 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투자금이 정부 국고가 아닌 민간 개발업자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고용 창출 증빙 같은 까다로운 조건 대신 정부에 직접 현금을 납부하는 방식이 미국 재정에도 이득이라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11일 오전 종로구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이 미국 비자심사를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 /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부터 “불필요한 규제인 EB-5를 없애고 골드 카드를 도입하겠다”고 밝혀왔고 9월에는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는 미국 대학을 졸업한 우수 인재나 자산가를 놓치지 않으려는 IT 업계와 재계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이민 자체를 수익 모델로 전환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돈 있는 이민자에게는 뒷문을 열어준 것과 달리, 일반 여행객과 서민층을 향한 빗장은 더욱 단단해졌다. 미 정부는 골드 카드 출시와 같은 날 한국 등 비자 면제국 국민이 이용하는 전자여행허가(ESTA) 심사를 대폭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는 ESTA 신청 시 최근 5년간의 소셜미디어(SNS) 계정,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는 물론 셀카 사진까지 제출해야 한다.

주요 외신들은 트럼프의 이중적 이민 정책에 우려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의 정보 수집 범위가 늘어난 만큼 ESTA 승인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이 철저한 비즈니스 논리로 재편되면서, 자산 규모에 따라 미국 입국의 문턱이 극명하게 갈리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