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9일(현지시각) “중국이 한국과 체결한 어업협정을 위반해 서해 잠정조치수역(PMZ) 안팎에 일방적으로 16개의 해상 구조물을 설치했다”며 “미국은 중국의 이 같은 시도를 인도·태평양 동맹국을 겨냥한 ‘회색지대(grey zone) 전술’로 규정하고 강력한 대응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회색지대 전술은 대규모 무력 충돌과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 정도의 저강도 도발을 활용해 안보 목표를 이뤄내려는 군사행동을 의미한다. 미국의 대표적 초당파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CSIS의 이 같은 주문은 미 조야(朝野)가 서해를 대만해협·남중국해 같이 중국 패권주의가 고개를 들고 있는 분쟁 수역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대형 부표와 철제 구조물을 잇따라 설치하는 방식으로 서해 ‘내해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빅터 차 CSIS 한국 석좌는 이날 CSIS 산하 북한 전문 웹사이트 ‘비욘드 패럴렐(BEYOND PARALLEL)’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이 서해에 설치한 구조물 관련 “이중 용도 목적을 위한 ‘민간’ 시설 설치, 한국 선박에 대한 중국의 괴롭힘은 남중국해·동중국해에서 베이징(중국)이 사용한 전술과 유사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차 석좌는 “2018년 이후 중국은 서해 PMZ 안팎에 부표 13개를 일방적으로 설치해 왔다”며 “중국은 또한 어류 양식을 명목으로 2개의 양식장(선란 1·2호)과 통합 관리 플랫폼 1개(애틀랜틱 암스테르담)를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PMZ 내에 구축했다”고 했다. 한 부표는 태양광 충전을 할 수 있는 전지판으로 덮여 있다.
◇ “남중국해도 상황 터지기 전까진 심각하게 생각 안했다”
중국이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PMZ 내에 대형 심해 양식장 구조물 등을 설치한 것은 PMZ 내 영구 시설물 설치를 금지하는 한중어업협정(2001년)을 위반한 것이다. 차 석좌는 이들 구조물을 PMZ 밖으로 이전해 달라는 한국 측 요구를 중국이 거듭 거부하며 한국의 감시활동을 차단해 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0년 이후 중국의 행위를 조사하려는 한국 선박의 노력 135건 중 27건이 중국 해안경비대에 의해 차단됐다”며 “여기에는 한국의 조사선 온누리호가 중국 해안 경비대와 올해 대치한 다수의 상황도 포함된다”고 했다. 중국은 지난 2월 온누리호가 PMZ의 중국 구조물 조사를 시도하자 해경 함적 2척, 고무보트 3척을 동원해 우리 측 활동을 방해하고 흉기로 위협까지 했었다. 지난 9월 중국이 해경을 동원해 우리 해양조사선과 장시간 대치한 사실은 10월 CSIS 보고서를 통해 뒤늦게 알려졌고, 국무부는 대변인 명의 성명에서 “중국은 항행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을 준수하기를 수십 년간 거부해 역내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고 했다. 차 석좌는 “이는 어업협정이나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대한 기술적 위반은 아니다”라면서도 “이는 남중국해 등에서 (섬이나 암초 등을) 군사화할 때 사용한 ‘점진적 주권 확장’ 방식”이라고 했다.
최근 공개된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군사 분야 최상위 지침인 국가안보전략(NSS)은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에서의 국제 규범 준수를 강조하고 있다. 차 석좌는 “NSS가 남중국해에 요구하는 내용은 서해(황해)에서 항행(航行)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한미 양국의 노력에도 적용된다”며 “해당 항로를 개방 상태로 유지하고, ‘통행료’ 없이 특정 국가의 자의적 폐쇄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억지력과 함께 강력한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차 석좌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는 “한미가 불법 구조물의 좌표를 공개한다면 지리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위성 사진도 확보가 가능할 것”이라며 “우리 같은 연구자들에게는 좌표가 공개되면 정말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22년 12월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과 관련해 바이든 정부가 북한과 용병기업 ‘바그너 그룹’ 간 무기 이전 위성 사진을 공개한 것을 언급하며 “그런 자료가 있으면 서해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차 석좌는 서해 상황의 심각성을 묻는 질문에 “남중국해에서 벌어지고 있던 그 상황으로, 너무 늦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며 “중국의 행동은 한국과의 협정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한국의 현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꺼릴 것이지만, 언젠가 중국이 서해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 석좌는 한국이 미국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등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모든 국가와 함께 중국의 행동을 지적하고 협상을 요구하는 다자(多者)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 스티븐 예이츠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최근 본지 인터뷰에서 중국이 서해에서 구사하는 전술이 남중국해에 (중국의 자체 영해 개념인) 구단선(九段線)을 그어 분쟁화한 수법과 판박이라며 “한국의 생존은 바다에서 국제 규범이 지켜지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골든타임을 놓치면 서해가 남중국해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한미가 발표한 팩트시트에는 대만해협에서의 일방적 현상 변경 반대, 항행 및 상공 비행의 자유 준수, 모든 나라의 국제법에 부합하는 해양 영유권 주장 등 중국을 겨냥한 문구가 다수 포함됐다.
이와 관련 우리 외교부 당국자는 “정부는 우리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해양 권익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가운데 중국 측과 실무 소통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외교 채널을 통한 논의의 세부 사항을 확인해 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 달라”고 했다.
☞서해 잠정조치수역 (PMZ)
서해에서 한국과 중국의 200해리(약 370㎞) 배타적경제수역(EEZ)이 겹쳐 ‘바다의 국경선’인 경계선 획정을 유보해둔 지역. 양국은 2001년 어업협정 때 이 지역에서 어업 행위를 제외한 시설물 설치나 지하자원 개발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