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의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9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한국과 중국이 2001년 어업 협정에 따라 서해에 공동 관리 해역인 잠정조치구역(PMZ)을 설정했지만 이런 협정에도 불구하고 2018년 이후 중국이 PMZ 내부 및 주변에 13개 부표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며 “미국은 중국의 ‘점진적 주권 확장(creeping sovereignty tactics)’을 인도·태평양 동맹국을 겨냥한 또 다른 회색지대(gray zone) 전술 사례로 규정해야 한다”고 했다. 또 한국이 분석을 위해 “중국 구조물의 좌표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미 조야(朝野)에서는 중국이 대만해협, 남중국해·동중국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서해에서도 ‘내해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난 10월 CSIS 보고서를 통해 중국이 해경을 동원해 우리 해양조사선과 장시간 대치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와 관련 국무부는 지난 4월 대변인 명의로 된 성명을 통해 “중국은 항행(航行)의 자유를 포함한 국제법을 준수하기를 수십 년간 거부해 자국의 경제 이익을 저해하고 역내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 구조물은 추후 군사용으로 전용될 수 있고, 이를 해당 수역에서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로도 삼을 수 있다. CSIS는 “이중 용도 목적을 위한 ‘민간’ 시설과 한국 선박에 대한 중국의 괴롭힘은 남중국해·동중국해 군사화 과정에서 베이징(중국)이 사용한 전술과 유사하다”고 했다.
최근 공개된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군사 분야 최상위 지침인 국가안보전략(NSS)은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에서의 국제 규범 준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빅터 차 CSIS 한국 석좌는 “NSS가 남중국해에 요구하는 내용은 서해(황해)에서 항행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한미 양국의 노력에도 적용된다”며 “해당 항로를 개방 상태로 유지하고, ‘통행료’ 없이 특정 국가의 자의적 폐쇄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억지력과 함께 강력한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스티븐 예이츠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본지 인터뷰에서 중국이 서해에서 구사하는 전술이 남중국해에 구단선(九段線)을 그어 분쟁화시킨 수법과 판박이라며 “한국의 생존은 바다에서 국제 규범이 지켜지냐에 달려 있다. 지금 골든타임을 놓치면 서해가 남중국해처럼 될 것”이라고 했다.
차 석좌는 이날 본지 통화에서 “좌표가 있다면 지리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고, 위성 사진도 확보가 가능할 것”이라며 “우리 같은 연구자들에게는 좌표가 공개되면 정말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2022년 12월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다는 의혹과 관련해 바이든 정부가 무기 이전 위성 사진을 공개한 것을 언급하며 “그런 자료가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서해와 관련해서는) 그런 조치가 없었다” “활동이 더 많이 드러날 수 있어 공개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차 석좌는 서해 상황과 관련해 “남중국해에서 벌어지고 있던 그 상황으로, 너무 늦기 전까지는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며 “중국의 행동은 한국과의 협정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이다. 현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꺼릴 것이지만, 언젠가 중국이 서해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차 석좌는 한국이 미국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등 중국의 ‘영향권’ 아래 있는 모든 국가와 함께 중국의 행동을 지적하고 협상을 요구하는 다자(多者)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