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4일 백악관 인근 '디 일립스'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5일 외교·경제·군사 분야를 아우르는 종합 전략 지침인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공개했다. 백악관이 주도해 작성하는 NSS는 향후 4년간 트럼프 대통령이 구사할 외교·안보 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될 최상위 문서다.

NSS는 ‘제1도련선’(일본 규슈 남단부터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방어선)에서의 중국 견제를 강조하며 한국·일본 등 동맹에 “국방비를 증액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부담 확대 압박이 커지고, 대북 재래식 방어는 한국이 맡고 주한미군은 대중국 견제로 역할을 확대한다는 ‘전략적 유연성’ 논의도 한층 더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트럼프 1기 NSS에서 17차례 언급됐지만, 29쪽 분량의 이번 보고서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북핵 문제가 미국 안보 우선순위에서 크게 후퇴한 것으로 해석된다. NSS는 또 전문(前文)에서 “미국이 세계 질서를 떠받치던 시대는 끝났다”고 했다.

◇ 백악관 “한·일 국방비 증액 촉구”… 中봉쇄용 제1도련선서 역할 강조

5일 공개된 미국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는 트럼프의 외교 정책이 “전통적·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오로지 ‘아메리카 퍼스트’ 두 단어에 기반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우선주의 원칙을 전면에 내세우며 중국과의 경쟁을 핵심축으로 삼고 동맹에 대한 방위 책임 확대를 강조한 것이다.

NSS는 인도·태평양 지역이 “다음 세기 핵심적인 경제·지정학적 격전지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인·태 지역에서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강력한 억지력 유지에 지속적으로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대만해협·남중국해 등에서의 국제 규범 준수를 강조하며 “제1도련 어디에서든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군대를 구축할 것”이라 했는데 이는 중국 패권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그러면서 “미국은 이를 단독으로 수행할 수 없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도 없다”며 “동맹국은 집단 방어를 위해 지출을 늘리고,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일본을 콕 집어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국가에 대한 부담 분담(burden-sharing) 확대를 고집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이들 국가가 적을 억제하고 제1도련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역량(신규 역량 포함)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고 국방비를 증액하도록 촉구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달 13일 공개된 한·미 정상회담 공동 설명자료(팩트시트)에서는 한국의 국방비를 2035년까지 GDP의 3.5%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 들어갔는데, 미국의 국방비 증액 압박이 한동안 더 이어질 거란 전망이 나온다.

NSS는 “동맹과 파트너국 중 부유하고 선진화된 국가들이 각자 지역에 대한 주된 책임을 지고, 우리의 ‘집단 방어(collective defense)’에 훨씬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고도 했다. 집단 방어는 특정 동맹 한 곳이 공격을 받으면 모든 동맹이 함께 대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안보 개념이다. 나토는 이를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어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한미는 상호방위조약을 맺고 있어 유사시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각자 헌법에 따라 행동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자동 개입’과는 구별된다.

NSS가 ‘제1도련에서의 중국 저지와 미국의 억제력 유지’를 강조한 것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한 대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제1도련선 전력을 제2도련선(일본 후슈부터 괌, 사이판, 팔라우 등을 연결하는 방어선)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일각에서 제기된 이른바 ‘신(新)애치슨 라인’에 관한 우려가 일부 불식된 것이다.

◇ ‘북한’은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아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4일 백악관 인근 엘립스 공원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에 참석해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트리 점등식은 미국 대통령 가족이 참석해 온 연례 행사다. 멜라니아 옆으로 보이는 선은 연단 앞에 설치된 방탄유리의 모서리다. /AFP 연합뉴스

이날 발표된 NSS의 아시아 파트는 대부분이 중국 관련 내용에 할애돼 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중국과 진행 중인 무역 협상의 민감성을 고려해 일부 표현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했다고 알려졌는데, 중국 권위주의·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다만 중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대만 문제와 관련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함으로써 대만을 둘러싼 갈등을 억제하는 것이 이상적인 우선 순위”라고 했다. 또 “대만에 대한 오랜 선언적 정책을 유지할 것”이라며 “미국은 대만해협에서의 현상 유지를 일방적으로 변경하는 어떠한 시도도 지지하지 않는다. 제1도련을 따라 해양 안보 문제를 상호 연계하며 대만 점령 시도나 우리에게 불리한 군사력 균형을 통해 대만 방어가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저지할 미국과 동맹의 역량을 강화할 것”이라고 했다. 남중국해에 대해서도 “잠재적 적대 세력이 마음대로 폐쇄할 수 있다”며 “일본을 비롯한 모든 국가와 강력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이번 NSS에서는 과거와 달리 북한이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입장은 계속 유지한다고 밝혀왔지만, 이런 내용이 NSS에 담기지는 않은 것이다. 트럼프가 재집권한 뒤 김정은과의 대화 의지를 발신하고 있으나 우선순위가 많이 내려갔다고 볼 수 있다. 2017년 12월 트럼프 1기 정부가 발표한 68쪽 분량의 NSS에는 북한이란 말이 17차례, 바이든 정부의 NSS에선 세 차례 언급됐다.

☞ 제1도련선

도련선(島鏈線)은 ‘섬을 사슬처럼 이어 놓은 선’이란 뜻으로, 제1도련선은 일본 규슈 남단에서 시작해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을 거쳐 베트남 인근까지 이어진다. 중국이 태평양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으로, 미국은 이 섬들에 군사기지를 두거나 동맹국을 배치해 중국 해군 진출을 막는 봉쇄선으로 활용한다. 이 개념은 1951년 6·25 전쟁 당시 덜레스 국무장관이 처음 제시했다. 당시엔 소련과 공산권의 팽창을 막는 게 목적이었지만, 냉전 종식 후에는 중국 견제용 봉쇄선으로 성격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