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컴퓨터 제조사 ‘델 테크놀로지’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델 부부가 2일 미국 아동 2500만명을 위해 62억5000만달러(약 9조2000억원)를 기부하기로 했다. 이 기부금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 중인 ‘트럼프 계좌(Trump Accounts)’ 사업에 투입된다. 트럼프 계좌란 미국에서 태어나는 신생아들을 위해 정부가 1000달러(약 150만원)씩 지급하는 계좌로, 아이들의 꿈을 위한 종잣돈을 마련해주려는 취지다. 백악관은 이날 델 부부를 초청해 기부 발표 행사를 열고 “아메리칸 드림의 첫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계좌는 지난여름 의회를 통과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 포함된 사업이다. 소득에 관계없이 미국 시민권자라면 자녀가 태어나면 계좌를 만들어줄 수 있으며 정부는 시드머니 1000달러를 넣어준다. 이 돈은 S&P 500 등 미국 주식 시장 인덱스를 추종하는 펀드에 투자돼 장기 복리 수익을 노린다. 펀드는 재무부가 지정하는 금융기관이 운용하며, 펀드 수수료는 0.1% 미만으로 제한된다. 아이가 18세가 되면 돈을 인출할 수 있고, 돈을 인출하는 시점까지 세금이 이연된다.
부모·친척·지인 등은 아이를 위해 연간 합산 최대 5000달러를 추가 납입할 수 있다. 부모의 고용주도 연간 2500달러까지 지원할 수 있는데, 모두 합해 5000달러를 넘길 순 없다. 만약 정부 초기 지원금 1000달러에 부모·회사가 연간 5000달러를 18년간 입금한다고 가정하면, 아이는 18세가 되면 원금만 총 10만달러(약 1억5000만원)의 자산을 마련하게 된다. 이 돈은 대학 학자금, 독립 및 결혼 자금 등으로 쓸 수 있다. 여기에 수익률이 곱해지면 더 큰 목돈이 된다. 백악관은 “전액 적립해 건드리지 않을 경우 28세가 되면 돈이 190만달러(28억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증여세는 면제가 되지 않지만, 미국은 증여세 공제 한도가 크기 때문에 세금 낼 일은 거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1인당 연간 1만9000달러(약 2800만원)까지 누군가에게 세금 없이 증여할 수 있다. 부모든 친인척·지인이든 상관없이 증여가 가능하며, 아이 입장에선 증여자가 2명이면 2배, 3명이면 3배로 공제받는 것이 가능하다. 미 정부는 우선 올해 1월 1일부터 2028년 12월 31일 사이에 태어난 신생아를 위한 예산을 마련했는데, 미국 독립기념일 250주년이 되는 내년 7월 4일 첫 계좌를 개설해 줄 예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지난 6월 “마이클 델이 직접 나에게 아이디어를 줬다”고 밝힌 바 있다. 델 부부의 기부금은 미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2025년 1월 1일 이전에 태어난 10세 이하 아동에게 1인당 250달러를 지원하는 데 쓰이게 된다. 가구 평균 소득 15만달러 미만인 지역의 아동에 한한다.
델 CEO는 세계 10대 부호 중 한 명으로 포브스는 그의 재산을 약 1490억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배우자 수전과 함께 1999년 재단을 만들어 교육·의료·금융 관련 자선 사업을 해왔다. 이번 기부는 재단 역사상 단일 기준 최대 규모라고 한다. 델은 “우리는 가장 현명한 투자가 바로 아이들에 대한 투자라고 믿는다”며 “모든 아이가 저축할 가치가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계좌를 넘어 훨씬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그는 CNBC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이런 계좌를 가지면 고등학교·대학교를 졸업하고,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시작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고, 수감될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간 기부 중 하나”라며 “이 선물은 특별히 부유하게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주어지며, 바라건대 그들은 언젠가 매우 부유해질 것”이라고 했다. 또 “앞으로 몇 달 안에 수백 개 주요 기업이 이 계좌에 기부할 계획을 발표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신생아를 위한 종잣돈을 지원한 사례는 영국 정부가 2005~2011년 신생아당 250파운드(저소득층은 최대 500파운드)를 바우처·현금 형태로 지급했던 ‘차일드 트러스트 펀드(CTF)’가 있다. 영국은 그러나 재원 부족 등으로 비과세 혜택만 주는 종합자산계좌 ‘주니어 ISA’ 제도로 전환했다. 이 밖에 캐나다와 싱가포르 등에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저축하면, 정부가 ‘매칭’해 돈을 넣어주는 계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