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제대로 못한 악마 같은 여성(evil woman)이라 생각합니다. 이 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고 명예를 훼손했어요. 은퇴를 해서 매우 기쁩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6일 오후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날 사실상의 정계 은퇴를 선언한 낸시 펠로시 전 연방 하원의장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밝혔다. 펠로시는 1987년 하원에 입성해 도합 20선(選)을 했고, 여성으로는 사상 처음 두 차례 하원의장(2007~2011년, 2019~2023년)을 지낸 민주당의 막후 실력자였다.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 진영에 관계없이 덕담을 건네는 것이 정치권의 오랜 관행이지만, 트럼프는 펠로시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악담(惡談)을 퍼부었다. 두 사람 사이의 질긴 악연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펠로시는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웠던 민주당 진영의 대표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두 번째 하원의장을 지내면서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트럼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두 번이나 가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펠로시를 공격했는데, 미시간주(州) 그랜드래피즈에서 가진 마지막 캠페인 유세에서는 펠로시에 대해 “사악하고 역겹다”고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여성에 대한 대표적 멸칭인 ‘비치(bitch)’를 입 모양으로 되풀이해 선거 직전 한 차례 논란이 됐다. 트럼프가 재집권한 이후에도 펠로시는 소셜미디어인 ‘트루스 소셜’에 공격 대상으로 단골로 등장했다. 펠로시는 지난 3일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지구상 최악의 존재”라고 비난했다. 펠로시가 1940년생, 트럼프가 1946년생이다.
미 정치권에서 트럼프와 펠로시의 악연은 워낙 유명한 탓에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장면이 많다. 2020년 트럼프의 의회 국정 연설(SOTU) 당시 뒤편 의장석에 앉아 있던 펠로시는 트럼프가 연설을 마치자 눈앞에서 원고를 찢어버렸다. 한 해 전에는 트럼프에게 보낸 펠로시의 ‘물개 박수’가 화제였다. 트럼프가 80분 연설 말미에 “우리는 복수, 저항, 보복의 정치를 거부해야 하며 무한한 협력, 타협, 공동선(善)의 가능성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하자 펠로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트럼프 쪽으로 두 팔을 쭉 뻗어 박수를 친 것이다. 마치 물개가 앞발을 파닥거리는 듯한 모습의 이 박수에는 조롱과 경멸의 의미가 담겼는데, 펠로시의 딸 크리스틴은 “이날 밤 엄마의 표정은 내가 10대 때 ‘너도 네가 잘못한 걸 알지’라며 짓던 표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트럼프의 독설과는 달리 재임 중 펠로시에게 최고 영예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한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역사상 최고의 하원 의장이었던 그녀는 삶의 많은 부분을 이 나라를 위해 바쳤고, 미국은 영원히 감사해할 것”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우리가 민주당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최고의 하원 의장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 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정책·정무 모두에서 탁월한 그녀의 능력 덕분에 수백만 미국인이 더 나은, 더 많은 기회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 상원 1인자인 척 슈머 원내대표는 “펠로시의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했고, 뉴섬은 “펠로시가 샌프란시스코, 이 나라에 미친 영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
한편 펠로시는 이날 ‘디 애틀랜틱’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은 선함을 추구할 때 가장 위대했다”며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동포를 위해 수없이 나섰고, 자유의 범위를 확장해 더 많은 이가 이를 누릴 수 있게 했으며, 국민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폭군(暴君)들을 물리쳤다. 이번 위태로운 순간에도 심오하면서도 개인적인 행동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건국 250년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역사는 고난 속 인내, 두려움 앞에서의 희망의 이야기”라며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앞으로 수십 년간 미국과 세계의 모습을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