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연방 하원의장을 지낸 민주당의 막후 실력자 낸시 펠로시(85)가 6일 내년 11월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987년 하원에 입성해 도합 20선(選)을 한 펠로시는 은퇴 압박에도 불구하고 내년 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이날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고맙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영상에서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자랑스러운 대표로서 마지막 임기를 수행할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역대 최장수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낸 미치 매코널 상원의원 역시 불출마를 선언, 미 정치의 한복판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다.
펠로시는 1940년 메릴랜드주(州) 볼티모어 시장과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토머스 달레산드로 주니어의 고명딸로 태어나 정치와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스물세 살 때 벤처캐피털(VC) 사업가인 폴 펠로시와 결혼해 전업주부로 다섯 아이를 키우다가 막내가 고교생이던 47세에 연방 하원의원으로 본격적인 정치인이 됐다. 정치인 집안에서 자라난 데다 남편의 재력과 인맥 도움도 받았지만, 특유의 정치적 감각과 열정적 의정 활동으로 관록의 정치인이 되면서 두 차례 하원의장(2007~2011년, 2019~2023년)까지 지냈다. 민주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인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 등이 펠로시의 정치적 수제자들이다. 지난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완주 고집을 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펠로시는 여든을 넘기면서 주변에서 정계 은퇴와 지역구 승계 가능성 등이 수차례 거론됐고, 2022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택에 자신을 노리고 침입한 괴한의 공격에 남편이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건강과 인지력 논란을 일으키는 고령 정치인들이 젊은 정치인들에게 기회를 주고 물러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펠로시는 지난해 12월 유럽 출장 도중 계단에서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수술을 받았는데, 올해 1월 119대 의회 개원 당시 평소 즐겨 신던 4인치(약 10cm) 하이힐 대신 굽이 없는 하늘색 플랫 슈즈를 신고 온 것이 화제가 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모든 사람에게 하이힐을 포기하는 날이 오는데 마침내 펠로시에게도 그 순간이 왔다”고 했다.
펠로시는 트럼프와 대립각을 세웠던 민주당 진영의 대표적인 인물로도 기억된다. 두 번째 하원의장을 지내면서 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트럼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두 번이나 가결했다. 이런 이유로 트럼프는 지난 대선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펠로시를 공격했는데, 대선 캠페인 마지막 유세에서는 “사악하고 역겹다”면서 여성에 대한 대표적 멸칭인 ‘비치(bitch)’를 입 모양으로 되풀이했다. 펠로시는 트럼프 1기 때인 2020년 트럼프가 의회 국정연설을 할 당시 연설이 끝나자마자 눈앞에서 원고를 찢어버렸는데, 이 모습은 지금도 소셜미디어 등에서 주기적으로 소환되는 장면이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정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정치인이 활동을 마감하게 됐다”고 전했다.
재임 중 펠로시에게 최고 영예 훈장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한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역사상 최고의 하원 의장이었던 그녀는 삶의 많은 부분을 이 나라를 위해 바쳤고, 미국은 영원히 감사해할 것”이라고 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우리가 민주당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최고의 하원의장 중 한 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 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정책·정무 모두에서 탁월한 그녀의 능력 덕분에 수백만 미국인이 더 나은, 더 많은 기회로 가득 찬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뉴섬은 “펠로시가 샌프란시스코, 이 나라에 미친 영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