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17일 백악관 앞에서 만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7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거친 욕설을 해가며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두 차례의 백악관 회담에 이어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만날 때마다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종전(終戰) 논의의 중재자로서 트럼프의 역할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가 젤렌스키를 훈계하며 시종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논지를 반복하며, 전쟁에서 지고 있는 젤렌스키가 러시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푸틴에게 파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전했다. 젤렌스키가 이에 맞서 언쟁하면서 회담은 ‘고함 대결(shouting match)’로 번졌고, 트럼프는 회담 도중 “이 지도, 이제 지겹다”면서 우크라이나 전황 지도를 내던진 것으로 전해졌다.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러시아 국기의 흰색·파란색·빨간색을 조합한 줄무늬 넥타이를 매고 오찬에 나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 기조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증폭시켰다.

지난 1월 트럼프 취임 이후 백악관에서 진행된 젤렌스키와의 회담은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2월 회담은 그간의 지원에 따른 금전적 대가를 바라는 트럼프와, 안전 보장 약속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젤렌스키가 충돌하면서 파행으로 끝났다. 약 50분에 걸쳐 회담이 생중계되는 가운데 트럼프는 “당신은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무례하다” “세계 3차 대전을 걸고 도박을 하고 있다”는 등의 발언으로 젤렌스키를 쏘아붙였다. 배석한 J D 밴스 부통령도 “(미국의 지원에) 고맙다고 해 본 적이 있느냐”며 얼굴을 붉혔다.

평소처럼 검은색 평상복 차림이었던 젤렌스키는 친(親)트럼프 성향 백악관 출입 기자에게서 “당신은 정장이 없느냐”는 모욕까지 들은 뒤 예정됐던 광물 협정 체결식도 취소하고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났다. 이후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한동안 전면 중단했다.

반면 8월 회담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가 알래스카에서 푸틴과 만난 지 사흘 만에 열린 회담에는 영국·프랑스·독일 등과 유럽연합(EU),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들이 동행해 젤렌스키를 측면 지원했다. 젤렌스키 역시 ‘고마운 줄 모른다’는 지적을 의식한 듯 우크라이나 아동 납치 문제를 제기한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트럼프는 공개 회담에서 젤렌스키의 눈을 쳐다보며 친근감을 드러냈고, 양측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양보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가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유럽 국가 사이에서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FT는 “트럼프가 푸틴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며 유럽 동맹국들에 실망을 안겼다”고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푸틴이 이번 회담에 앞서 전화 통화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을 다시 한번 바꾼 것으로 보인다”면서 “푸틴은 트럼프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허풍, 거짓 주장, 시간 끌기, 아첨 등의 다양한 전술을 동원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