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 이집트 홍해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가자지구 평화를 위한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13일 홍해 연안의 이집트 휴양 도시 샤름 엘 셰이크 국제회의장. ‘PEACE(평화) 2025’라고 돼 있는 대형 장식물 뒤 테이블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중심으로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 압델 파타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착석해 초록색 표지로 된 문서에 돌아가며 서명을 했다.

뒤편에서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서방국 정상,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과 샤바즈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 등 트럼프가 중재했던 분쟁국 정상들이 이를 지켜봤다. 20여 국 정상들은 이날 ‘가자지구 평화 정착을 위한 정상회의’라는 이름으로 집결했다.

앞서 이날 2년간 교전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수감 죄수와 억류 인질을 맞교환하며 첫걸음을 뗀 트럼프의 가자 평화 구상 1단계를 공식화하는 자리였다. 휴전과 인질 석방에 맞춰 이스라엘을 찾아 의회 연설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부각시킨 트럼프는 이번 정상회의에서도 자신을 중심에 세웠다. 그는 “오늘은 전 세계와 중동에 대단한 날”이라며 “우리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중동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자신이 주도한 평화 구상 1단계에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합의한 점을 강조하면서 “이건 가자 전쟁의 종식 그 이상을 의미한다. 신의 도움과 함께 아름다운 중동 전체를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3일 이집트 샤름 엘셰이크에서 열린 ‘가자 지구 평화 정착을 위한 정상회의’에서 미국·이집트·카타르·튀르키예가 서명한 합의문을 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번 정상회의는 개최국 이집트의 엘시시 대통령과 트럼프의 공동 주재 형식으로 준비됐지만 트럼프의 독무대로 진행됐다. 트럼프의 직전 이스라엘 일정이 길어지면서 정상회의는 예정보다 두 시간 늦게 시작했지만 정상들은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미소와 박수로 트럼프를 맞이했다. 가자지구에서 6만8000여 명, 이스라엘에서 1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의 총성을 실제 멈추게 한 트럼프의 공을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트럼프는 서명 전 각국 정상과 악수하고 사진 촬영을 하는 데 20여 분을 보냈다. 트럼프가 연설을 하는 동안 각국 정상들은 그의 뒤에 병풍처럼 늘어섰다. 트럼프가 “그들이 왜 서기로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연설을) 짧게 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농담하는 등 여유를 부렸다. ‘트럼프에 의한’ 순서뿐 아니라 ‘트럼프를 위한’ 순서도 마련했다. 엘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라고 확신했다”며 최고 등급 훈장을 수여했다.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중단 없는 노력으로 평화가 이룩됐으니 그는 ‘평화의 사나이(man of peace)’”라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노골적으로 노벨 평화상 수상 의지를 내비쳤다가 불발된 트럼프의 심정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이번 정상회의에 교전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다만 하마스의 통치력이 닿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마흐무드 압바스 수반은 참석했다. 트럼프와 압바스는 별도로 만나 악수하며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에 따라 평화 구상 2단계 구상 실행 과정에서 미국이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가 이번 중동 일정을 통해 자신의 평화 중재 성과를 대대적으로 부각하는 배경에는 내년 노벨 평화상을 겨냥해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한편, 셧다운(연방 정부 업무 정지) 상황에서 외교 성과를 통해 국정 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분석이다.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공화·민주당 간 갈등으로 13일째 셧다운이 지속되면서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박물관과 동물원이 운영을 중단하고, 각종 경제 통계 자료 발표가 지연되는 등 실생활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에 억류돼 있다 풀려난 팔레스타인 포로들이 13일 가자지구 남부 칸유니스에 도착해 주민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며 답하고 있다. 하마스가 생존 인질 20명을 풀어 주는 데 맞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수감자 및 구금자 1968명의 송환을 시작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의 구상은 일단 효과를 보는 모습이다. 가자지구에서 실제로 총성이 멈추고 이스라엘 인질들이 풀려나면서 민주당 거물들 사이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은 “트럼프와 그의 팀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고 했고,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트럼프가 합의를 끌어낸 것에 대해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트럼프와 정부를 진심으로 칭찬한다”고 했고,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트럼프를 포함해 “이 순간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을 칭찬하고 싶다”고 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표지에 트럼프의 사진과 함께 ‘그의 승리’라는 문구를 넣었다.

다만 진짜 고비는 하마스 무장해제와 이스라엘군 철수, 아랍국이 참여하는 국제 안정화군 배치, 새로운 민간 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평화 구상 2단계부터라고 많은 외신들이 전망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모두 무장해제를 놓고 이견이 크고 포괄적 합의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합의에 난항을 겪을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또 이날 백악관이 발표한 중동 평화 선언에는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에 관한 언급은 없다는 점, 이스라엘·하마스는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은 점 등 곳곳에 뇌관이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뉴욕타임스는 “매우 공개적이었던 행사에 비해 문건을 통해 서명국에 요구되는 것은 여전히 불분명하다”며 “트럼프가 중동을 떠나면 아랍 중재국들은 더 까다로운 세부 사항을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