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30일 워싱턴 DC의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는 구윤철 경제부총리, 김정관 산업부 장관,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참석한 가운데 특파원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이 열렸다. 세 사람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상호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고, 한국은 미국에 3500억 달러(약 499조 6250억원)에 투자하는 합의를 타결했다”고 밝힌 직후였다. 김 장관은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당시 광화문에 광우병 시위를 위해 ’1000만 인파’가 운집한 사진을 미측에 보여줬다며 “이런 부분이 한국 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됐다”고 했다. 한국 저변에 깔려 있는 반미(反美) 정서가 레버리지(leverage·지렛대)가 돼 쌀·소고기 시장에 대한 추가 개방을 막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김 장관의 이런 주장과 달리 백악관이 “한국이 자동차와 쌀 같은 미국산 제품에 역사적인 시장 접근권을 제공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부분은 아직 한미 간 ‘진실 게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동시에 한미가 7월 30일 큰 틀의 합의에 이르렀다고 발표했음에도 3개월째 관세 협상을 매듭짓지 못하면서 미국을 대하는 우리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말도 거칠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고, 시사 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는 “미국 측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저는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2일에는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비공식 경로로는) ‘한국을 밟는다고 밟아지는지 한번 보라, 밟는 발도 뚫릴 것’ 같은 말도 주고받는다”고 했다. 김 장관은 “책상도 치고, 목소리가 올라가기도 한다”며 협상 과정을 설명했다. 70년 동맹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수사(修辭)다.
장외로 가면 미국을 향한 말들이 더 거칠어지고 있다. 강성 친명 인사 모임인 ‘더민주전국혁신회의’는 트럼프의 ’3500억 달러 선불(up front)‘ 발언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정도가 있다”며 “한국은 경제 식민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13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에서는 조국혁신당 김준형 의원이 서울 세종로에 있는 주한 미국 대사관이 “1980년대부터 올해까지 단 한 푼도 청사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으며 부지·건물을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사용료를 받지 않는 것이 배임 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의원은 부지 임대료가 시세로 연간 193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조국혁신당은 “트럼프의 (남은 임기) 3년은 너무 길다”는 새로운 구호를 꺼내 들었고, 역시 원내(院內) 정당인 진보당은 “미국은 동맹을 파괴하는 경제·안보 협박을 중단하라”며 “대한민국은 결코 협박에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분위기 속 민노총 등 좌파 단체들은 주한 미군 철수, 한미 연합 훈련 취소 같은 기존의 레퍼토리를 다시 들이밀고 있다. 이달 말 트럼프 방한(訪韓)을 계기로 반(反)트럼프 시위도 2017년 이후 8년 만에 재현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도 한미가 외교·안보, 무역·통상 현안을 놓고 갈등을 빚을 때면 정부가 협상을 위해 의도적으로 반미 시위를 조장하거나 저변의 반미 정서를 자극한 적이 있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전직 인사는 “한미 간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경우 민정 라인에서 ‘반미 시위·여론을 어느 정도 이용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가기도 한다”며 “미국 측에서도 한국 내 반미 여론을 굉장히 예의 주시하고 있어 잘만 이용하면 협상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 국민 300여 명이 억류됐다 1주일 만에 풀려난 조지아주(州)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구금 사태 이후 국무부 2인자인 크리스토퍼 랜도 부장관이 한국으로 날아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방한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진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도 최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만나 비자 문제 등에 관한 전폭적인 협조를 언급했다고 한다.
다만 자국 내 반미·반(反)트럼프 여론을 결집해 트럼프의 관세 드라이브에 맞서려다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맞게 된 주요국 선례(先例)들도 있어 참고가 필요해 보인다. 트럼프 앞에서는 기존 외교 문법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스위스는 ‘무역 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라’는 미측 요구를 뭉개다 39% 고율(高率)의 관세를 맞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카린 켈러주터 대통령이 워싱턴 DC를 찾았지만 트럼프와 만나지 못했고, “1515년 프랑스전 이후 가장 큰 패배”라는 자국 내 비판 여론에 직면해 있는 상태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명품 시계 업체인 롤렉스가 트럼프를 US오픈 ‘VIP 박스’에 초청했을 정도로 공을 들이고 있으나 여전히 진척이 없다. 브라질 역시 좌파 정부를 이끌고 있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이 “그링고(스페인어·포르투갈어권에서 대체로 영어권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는 브라질에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멸칭(蔑稱)으로 트럼프의 자존심을 자극했다가 50%의 ‘관세 폭탄’을 맞았다.
전직 외교부 고위 간부는 “트럼프가 기존 미 대통령들과는 다른 성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협상 교착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이라면서도 “동맹 간에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문을 닫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야지 이를 밖으로 꺼내 여론전을 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는 건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보 수장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최근 브리핑에서 여권 내 강경 발언의 영향을 묻는 질문에 “미국에 대해 나오는 이야기들이 꼭 협상의 레버리지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지아 사태 등에 대한) 국민 감정이 있겠지만, 협상이 상당히 첨예한 상황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오버 플레이(과도한 행동)’를 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