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에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무역 전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겨냥해 희토류 통제를 대폭 강화했고, 미국은 대(對)중국 100% 추가 관세로 맞불을 놓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6년 만의 대면 회담에 앞서 강(强) 대 강으로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양국의 압박은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기싸움’으로 해석되지만, 물밑 조율에 실패해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세계 경제에 큰 격랑이 예상된다. 경주 APEC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아예 개최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0일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에 반발해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100% 추가로 부과하고 핵심 소프트웨어 기술의 수출도 제한한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의 대중국 관세율은 평균 55% 수준인데, 이를 155% 초고율로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앞서 중국 상무부는 지난 9일 희토류 합금 및 관련 소재의 대미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는 수준의 통제 방침을 발표했다. 희토류는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군사 전자 장비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로 중국이 전 세계 공급의 약 70%를 점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이 전 세계를 ‘인질’로 삼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하자, 중국 상무부는 12일 “싸움을 바라지 않지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고집대로 조치를 취하면 단호하게 상응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격한 관세 전쟁을 벌이던 미·중은 네 차례의 고위급 무역 협상을 통해 관리 국면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최종 담판’ 격인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가까워지면서 다시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양측 모두 협상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다. 트럼프는 소셜미디어에 “시진핑과 만날 이유가 없어 보인다”고 썼다가, 이후 취재진에게 “아직 회담을 취소한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중국 상무부도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고 했다.
◇美 급소 때린 시진핑, 즉각 보복 나선 트럼프… 강 대 강 충돌 격화
미·중은 올해 네 차례의 고위급 무역 협상을 통해 상대국에 부과한 100%대 보복 관세 부과를 유예했다. 미국의 대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와 중국의 대미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각각 정상화하기로 했다. 관계 개선의 걸림돌이었던 중국계 동영상 플랫폼 틱톡의 미국 사업권 매각도 어느 정도 타협을 이룬 상태였다. 양국에서는 이달 말 경주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만나 ‘극적인 최종 합의’를 도출할 것이라는 신호가 여러 차례 나왔으나, 정상회담을 보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에 급속히 다시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9일부터 미국을 겨냥한 압박 조치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먼저 희토류와 관련해 자국을 벗어나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희토류 0.1% 이상 함유 시)은 물론 관련 기술과 장비까지 통제하겠다고 밝혔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에 대한 압도적인 정제·생산 지배력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을 압박한 것이다. 중국은 또 14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칩, 256단 이상 메모리 반도체 제조·테스트 장비, 군사 용도로 쓰일 수 있는 AI(인공지능) 연구·개발에 투입되는 희토류는 이중 용도 물자로 개별 심사하겠다고 했다. 10일에는 미국 선박에 대해 ‘특별 항만 서비스료’를 부과하겠다고 통지했고,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의 차량용 반도체 설계사 오토톡스 인수 건에 대해 반독점 조사를 개시했다.
트럼프 1기 당시 관세 압박 속에 줄곧 수세였던 중국이 2차 관세 전쟁에서는 희토류라는 ‘전략 무기’를 동원해 미국 방산·반도체 공급망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미 전략국제연구소(CSIS)의 스콧 케네디 연구원은 “중국이 관세·수출 규제·대만 문제에서 미국이 의미 있는 양보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희토류 카드를 다시 꺼냈다”고 했다. 폴리티코는 “트럼프와의 무역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시진핑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자국 기술·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생산된 제품에 대해 역외 통제를 적용하는 ‘해외직접생산품규칙(FDPR)’으로 중국을 견제해왔는데, 중국이 희토류를 통해 똑같은 방식으로 역공을 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미국의 통제 리스트는 3000건이 넘지만 중국의 수출 통제 리스트 물자는 900여 건에 불과하다”고 했다.
미국도 중국의 공세에 즉각 반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10일 중국산 수입품 전반에 대한 100% 추가 관세를 예고하고, 핵심 소프트웨어 수출 통제를 다음 달 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브렌던 카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은 “미국 주요 온라인 소매 웹사이트들이 금지된 중국산 전자 제품 수백만 개를 판매 목록에서 삭제했다”고 했다. 미국 교통부는 미국을 오가는 중국 항공사의 러시아 상공 비행 금지 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는 10일 ‘트루스 소셜’에서 “중국이 무역과 관련해 극도로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됐다”며 “국제 무역에서 이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으며 다른 국가와의 거래에 있어서 도덕적 수치”라고 했다. 이후 기자들과 만나서는 “그들(중국)은 보잉 항공기를 많이 갖고 있는데, 그들에겐 (미국산) 부품이 필요하다”며 항공기 부품에 대한 통제도 보복 옵션 중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중국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광범위한 독점적 지위를 보유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며 “미 대통령으로서 그들의 조치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고통스러울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미국에 매우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미·중 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면서 뉴욕 증시는 트럼프가 전 세계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한 4월 3일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다우는 1.9%, S&P500은 2.71%, 나스닥은 3.56% 각각 급락했다. 유가와 가상 화폐 등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미·중이 완전히 판을 깰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양측에 경제적 부담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중국은 청년 실업과 국내 소비 부진 등의 내부 문제가 심각한 만큼 미·중 관계의 추가 악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국도 중국이 희토류 통제를 실제로 하면 자동차 공장이 가동 중단될 위기에 몰릴 수 있다.
트럼프가 100% 관세 부과 시점을 11월 1일로 설정하고, 중국도 희토류 수출 통제 조치를 12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한 것은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협상을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과 허리펑(何立峰) 중국 부총리 라인 등 고위급 물밑 접촉을 통해 상황을 봉합할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의 ‘정상회담 취소’ 돌발 발언은 특유의 ‘거래의 기술’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트럼프는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싱가포르 회담을 한 달 앞두고도 ‘취소’ 발표를 했다가 이틀 만에 번복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기자들과 만나 “우리가 (미·중 회담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곳(경주)에 갈 것”이라며 “나는 아마 우리가 회담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