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2일 ‘비핵화 목표 포기’를 전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날 수 있다고 밝히면서, 다음 달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두 사람의 깜짝 회동이 이뤄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트럼프는 1기 때인 2018년 김정은과 싱가포르·베트남에서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2019년 6월에는 군사분계선(MDL)을 도보로 넘어 판문점에서 회동한 적이 있다. 트럼프가 그동안 여러 차례 김정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대화 의지를 내비쳤다. 또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개인적인 동기부여도 있기 때문에 미·북 정상 간 회동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부터 “나는 김정은과 잘 지냈고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안다” “그도 내가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은 없었다. 취임 당일인 올해 1월 20일에는 “이제 그는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며 “김정은은 나를 좋아했고 내가 돌아온 것을 반기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핵보유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핵무기 제조·운용 기술을 보유했다고 인정받는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 등 공식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트럼프 정부의 북핵에 관한 관점이 ‘비핵화’에 집중했던 바이든 정부와는 다를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해석됐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 장관도 인사 청문회 답변에서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불렀다.

트럼프는 지난 3월 31일에는 “김정은과 소통이 있다”며 미·북이 접촉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미 정부가 이른바 ‘뉴욕 채널’이라 불리는 주유엔 북한대표부를 통해 여러 차례 트럼프의 친서(親書)를 전달하려 했지만 북한 외교관들이 수령을 거부했다고 언론들이 보도했는데, 백악관은 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트럼프는 김정은과의 서신 교환에 열려 있으며 2018년 싱가포르 회담 때와 같은 진전을 원한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김정은과의 만남을 추진할 것이라면서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김정은이 지난 21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박수를 치는 모습을 22일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김정은은 이 자리에서 “나는 아직 트럼프에게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고 했다. /조선중앙TV

외교가에서는 김정은이 APEC을 계기로 한국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북 정상이 판문점 같은 제3의 장소에서 깜짝 회동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트럼프 입장에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김정은과의 회담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외교 빅 이벤트이기도 하다. 워싱턴 DC의 한 소식통은 “트럼프 입장에선 김정은과 사진 한 장만 찍어도 이를 ‘외교적 승리’로 포장해 내년 11월 중간 선거 전까지 성과로 홍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관건은 트럼프가 ‘비핵화 포기’라는 전제 조건을 수용할지 여부다. 트럼프는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불렀지만, 미 행정부 차원에서는 북한 비핵화에 대한 목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일단 김정은을 불러낸다는 명분으로 비핵화 원칙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비핵화 외에 미·북 정상이 만나 논의할 수 있는 어젠다는 유해 발굴이다. 북한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미군 전쟁 포로·실종자 유해 수습 협력을 약속했고, 같은 해 8월 유해 상자 55개를 전달한 바 있다. 현재까지 여기서 100명이 넘는 미군의 신원이 확인됐는데, 트럼프 정부 국방부는 “미·북 채널 복원에 유해 발굴은 좋은 수단”이라고 했다.

APEC을 계기로 미·북 대화가 성사되지 않더라도 트럼프는 계속해서 김정은과의 대면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지난 19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내년 초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 했는데 이때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 한국석좌는 지난 19일 기자회견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베이징에서 만나는 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