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서부는 오대호와 대평원 지역을 아우르는 미시간·인디애나·위스콘신·오하이오 등 12주(州)를 가리킨다. ‘중서부의 따뜻함(Midwestern Nice)’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이곳 사람들은 타인에게 공손하고 친절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동시에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제조업 공동화로 인한 실업과 소득 감소 문제가 심각해 경쟁에서 뒤처진 백인들의 열패감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레드넥’ ‘힐빌리’ 같은 멸칭(蔑稱)으로 불리는 이 지역 백인 저학력·노동자층은 대선 같은 전국 단위 선거에서 결과를 좌우하는 스윙 보터로 떠올랐고,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외치던 변방의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트럼프의 이후 ‘MAGA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꼽히는 J D 밴스 부통령도 오하이오 출신이다.
일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중서부 지역에 대규모 투자는 물론 외교력을 집중해왔다. 지난 7~9일 도쿄 제국 호텔에서는 일본의 ‘일본·미국 중서부 협회(JMWA)’와 미국의 ‘미국 중서부·일본 협회(MWJA)’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연례 콘퍼런스가 열렸다. 올해로 55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매년 미국과 일본을 번갈아가면서 열리는데 일 외무성·경제산업성, 미 국무부·상무부 등 정부 고위급들은 물론 경제인 수백 명이 모여 무역·투자 분야에서 교류 협력 의지를 다진다. 지난해 오하이오 콜럼버스에서 열린 행사는 약 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진행됐다. 올해도 무토 요지(武藤容治) 경제산업상, 이와야 다케시(岩屋毅) 외무상, 야마다 시게오(山田重夫) 주미 일본 대사 등이 나서서 트럼프의 ‘관세 전쟁’ 속 미·일 교류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공동 성명도 채택했다. 중서부를 관할하는 재외공관장인 시카고·디트로이트 주재 일본 총영사들도 비행기를 타고 도쿄까지 날아왔다. 도요타, 전일본공수(ANA), 미쓰비시 로지넥스트 등 미국에 투자한 기업 리더십들도 눈에 띄었다.
미국 측에서는 트럼프의 오랜 후원자인 조지 글래스 주일 미국 대사를 비롯해 공화당 소속 짐 필런 네브래스카 주지사, 민주당 잠룡인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 데이비드 톨런드 켄터키 부주지사 등이 참석했다. 최근 일본 외교가에서 ‘골프 외교’로 화제 몰이를 하고 있는 글래스는 연설에서 “미국의 제조업 중심지인 중서부는 미·일 파트너십의 원동력”이라며 “수십 년간 이어진 이 파트너십을 통해 우리는 사업 관계를 구축하고 있고 경제를 성장시키며 전통 산업, 신흥 기술 분야 모두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고 했다. 필런은 120년 전 일본 이민자들이 중서부 네브래스카에 와서 철도 건설에 기여한 역사 얘기까지 언급해가며 양국 간 유대를 강조했다. 필런은 지난 7월 미·일이 무역 합의를 타결했을 당시 주요 행정가들 중 가장 먼저 축하 메시지를 냈을 정도로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로 분류된다. 후지히 히사유키(藤井比早之) 외무성 부상은 “중서부 지역에서의 미·일 경제 유대는 동맹을 지탱하는 핵심 기둥 중 하나”라고 화답했다.
일본은 중서부에 ‘일본 기업들이 많은 투자를 하고 있고 일자리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을 적극 알리고 있다. 컨퍼런스 마지막 날인 9일 리셉션에는 인디애나의 주요 5개 도시 시장이 참석했는데, 중서부 10주를 관할하는 미조부치 마사시(溝渕将史) 시카고 총영사는 “인디애나에는 320개의 일본 기업이 있으면서 7만1000명을 고용하고 있다”며 “이는 신뢰와 우정, 문화 교류를 기반으로 한 협력 관계”라고 했다. “일본은 켄터키의 최고 외국인 투자자이자 일자리 크리에이터” 같은 문구가 주미 일본 대사관이나 일본 고위 관계자들의 소셜미디어에 종종 등장한다. 이는 트럼프 정부의 우선순위 중 하나가 미 제조업의 부활을 통한 중서부 지역 경제 복원이기 때문이다. 정권의 명운(命運)이 걸려있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도 이런 부분을 적극 알리고 있다. 밴스는 트럼프가 영국 국빈 방문 중인 17일에도 로리 차베스-디레머 노동장관 등과 함께 미시간 호웰의 금속 도장 공장 시설을 둘러봤다.
한국은 재작년 기준 215억 달러(약 29조6700억원) 투자를 약정한 최대 대미(對美) 투자국이지만 각 주 정부를 대상으로는 그에 걸맞은 밀착 외교를 하지 못하고 있다. 중서부에 투자한 기업들은 “이름만 미국이고 실상은 격오지”라는 주재원들 자조 속 인력난을 겪고 있다. 남부의 떠오르는 경제 성장 엔진인 조지아의 경우 현대차·한화 등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집중돼 “한국 덕분에 먹고산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공화당 소속 브라이언 켐프 주지사는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 공장 구금 사태 당시 불법 이민 단속을 지지한다며 거리를 두다가 1주일이 지난 뒤에서야 “이번 불행한 사건이 수십 년간 함께 구축해 온 상호 이익 파트너십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 했다. 현대차 공장이 지역구인 버디 카터 공화당 의원 역시 단속 영상을 올리며 “대담한 행동에 박수를 친다”고 했는데, 이와 관련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최근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우리 국민을 질책한 것은 결코 예의가 아니다”라며 항의 서한을 발송했다.
한미 간 이 같은 외교력의 차이는 결국 돈의 문제이기도 하다. 많게는 20개에 가까운 로비스트와 어드바이저리 펌(Advisory Firm·자문 회사)을 거느리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의회나 연방 정부 등을 상대로 아웃리치를 하기에도 버겁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특정 한국계 로비스트가 10년 넘게 대사관 일감을 독점 수주하다시피 하고 있다. 워싱턴 DC의 일본 대사관은 트럼프와 직통이 가능하다고 알려진 플로리다 출신의 브라이언 발라드가 설립한 ‘발라드 파트너스’와 같이 시대와 트렌드에 맞춰 로비스트를 고용해 대미 외교에 활용하고 있다. 일본 공관장들이 중서부와 도쿄를 오가는 것과 달리 한국은 지난 3달 가까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할 대사가 부재했고, 미국 내 총영사관 9곳 중 뉴욕·휴스턴·애틀랜타·호놀룰루 등 4곳이 공석(空席)이다. 트럼프 정부 들어 한국은 일본과 달리 정상회담을 비롯한 외교·안보, 경제·통상 분야에서 구속력 있는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